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일호(河一浩)  1717년(肅宗 43) ~ 1796년(正祖 20)

 

공의 자(字)는 이보(履甫)요 호는 죽와(竹窩)이다. 단지공 협(悏)의 5대손으로 인재공(忍齋公) 윤관(潤寬)의 장손이며 처사 응회(應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자품(資稟)은 온후(溫厚)하고 후덕(厚德)하였다.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교와(僑窩) 성섭(成涉)·상계(霜溪) 권위(權煒) 등과 학문을 강론하고 성리학에 정진(精進)하였다. 죽촌(竹村) 윤일(潤一) 공과 치와(癡窩) 응명(應命) 공이 진양하씨 족보를 중수하시다가 연이어 손세(損世)하니 그 일을 이어받아 1770년에 오방재에서 경인보를 간행하고 그 후서(後序)를 썼다. 또, 문중의 원사(院祠) 관리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여 오방재(梧坊齋) 창건 후 80여 년을 지나는 동안 풍우에 심히 퇴락(頹落)하여 유지가 어려운 상태에 이른 것을 1764년에 신암공(新庵公) 후손인 이광태(李光泰)와 협의하여 문중의 협력으로 응석사(凝石寺)의 일옥(一屋)을 매득(買得)하여 규모를 확충(擴充)하여 개보수(改補修)하였다.

 

배위는 함안조씨(咸安趙氏) 창운(昌運)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 국담(菊潭) 진백(鎭伯), 죽모재(竹慕齋) 진탁(鎭卓), 진억(鎭億), 복와(復窩) 진중(鎭中)이다. 병조좌랑 서양(西暘) 권사호(權思浩)가 지은 행장(行狀)과 족후예(族後裔) 겸진(謙鎭) 찬 갈명(碣銘)이 있고 성섭(成涉)〮·박내오(朴來吾)·이우육(李宇錥) 등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는 문집 『죽와산고(竹窩散稿)』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