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진태(河鎭兌)  1737년(英祖 13) ~ 1800년(正祖 24)

 

자(字)는 찬언(贊彦)이요 초휘(初諱)는 찬(鑽), 호는 행정(杏亭)이다. 진사 증(憕)의 6세손이며, 생원공(生員公) 명(洺)의 현손이고 습정재(習靜齋) 응운(應運)의 손자요, 재악(載岳)의 아들이다.

 

공은 천성이 영오(穎悟)하고 효심이 남달랐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에 어머니 명(命)으로 무송(撫松) 조희맹(趙希孟)의 문하에 취학(就學)하였다가, 하루는 조(趙) 공에게 흐느끼며 아뢰기를, “소자 운명이 기구하여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오직 노모가 계신데, 슬하를 떠나온 지 십년입니다. 비단 소자의 지극한 정이 재촉할 뿐만 아니라 생각건대 노모도 역시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즉일로 돌아와 오직 노모 봉양에 전념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집에 장서(藏書)가 거의 천여 질(秩)이 있고 베껴 쓴 것이 수백 여 권인데 공의 손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송나라 장재(張載)의 이학(理學)을 수년간 공부하여 여러 대가(大家)들의 주해(註解)를 모아 『서명집(西銘集)』이라는 책을 만들어 사람들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다.

또, 창주(滄洲) 선생 문집이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므로, 당세 사우(師友)들의 집에서 수년 동안 널리 찾아 모아서 필사로 책을 만들었고, 각처 선영에 비갈(碑碣)을 세워 묘의 수호에 정성을 다했으며, 창주공 양모(養母) 강(姜) 씨 정려(旌閭)가 오래되어 기울어지고 퇴락하였으므로 경신(庚申, 1800년) 여름에 중건(重建)하였다. 병환이 심한데도 전래 유루(遺漏) 토지로써 선대 일을 보완(補完)하고 잉여분은 의논하여 의장(義庄)을 설치했다. 선사(先師) 진필(辰必) 제사에 60년을 한결같이 물품을 보내 도왔고, 무송(撫松)의 옛집이 훼손된 지 오래였는데 공이 출연(出捐)하여 중수하였다. 상(喪)을 당한 사람에겐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고, 노인을 봉양하는 이에게는 음식을 보내주고, 재예(才藝)가 있는 사람은 부지런히 가르쳤으며, 족인(族人) 중 가난하여 필법(筆法)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에겐 종이와 붓을 주어 인재(人材)로 키웠다. 선대의 뜻을 바꾸지 않았고, 말한 것은 그대로 실천하여 매사에 충신(忠信)을 주로 삼았다.

 

고을 사람들이 그 행적이 민멸(泯滅)해 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 지극히 훌륭한 행적을 들어 여러 번 감영(監營)에 호소하여 공의(公議)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다가 1891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추증(追贈)되었다. 1892년에 문헌공(文獻公) 송근수(宋近洙)가 지은 정려기(旌閭記)가 있다.

 

배위는 증영인(贈令人) 진양강씨(晉陽姜氏)로 강한(姜榦)의 따님이고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수은(睡隱) 성범(聖範)과 사농와(士農窩) 익범(益範)이다.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가 지은 행장(行狀)과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찬 묘지(墓誌)가 있고 유고(遺稿)로 「행정문집(杏亭文集)」이 있다.

 

정려기(旌閭記)

 

진양군(晉陽郡)에 전에 독실한 행실이 있는 효자가 있었으니, 바로 처사(處士) 하진태(河鎭兌) 공이다. 공은 정사년(1737)에 나서 정조 경신년(庚申1800)에 별세했다. 고을 사람들이 그 행적이 민멸(泯滅)해 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 지극히 훌륭한 행적을 들어 여러 번 감영(監營)에 호소하여 공의(公議)가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현재 임금인 고종(高宗) 신묘년(辛卯, 1891)에 임금이 거동하는 길에서 맞아 하소하여 비로소 정포(旌褒)를 받게 되어, 정려(旌閭)가 우뚝이 서서 빛났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머리 숙여 절하니, 모두 효자의 정려인 것을 알았다. 조정에서 효성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가 이에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게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아. 훌륭하구나!

 

공은 천성으로 타고난 효성으로 6세 때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님 섬김을 50년을 하루같이 하여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기를 힘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병환이 위중할 때를 당하여 병세의 경중을 알기 위하여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렸다. 눈서리를 무릅쓰고 병이 낫기를 하늘에 기도드리면서 스스로 글을 지어 빌었는데, 그 내용이 모두 지성에서 나왔다. 마침내 신명의 도움을 입어 곧 원기를 회복하여 능히 80세까지 살다가 별세했다. 이때 공의 나이 이미 50세가 넘었으나 복상(服喪)하기를 예법대로 다해서 몸에는 상복을 벗지 않고 입에는 양념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후에 제사 날을 당해서도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 했다. 이 효성을 미루어 조상을 받들고 종족에 돈목하여 역시 모두 처지에 따라 정성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 늙어서까지 모든 행실이 환히 빛난다.

 

대개 효성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나, 인욕(人慾)이 해쳐, 타고난 천성을 잃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공은 이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착한 성품을 온전히 보존하여 위로는 신명의 감동을 입었고, 아래로는 인심의 추앙(推仰)함을 얻어, 마침내 태평 세상에 나타내어 포상함이 있어 백세후에도 흠모하여 칭송하게 했으니 이른바 지성은 신명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심재 선생(心齋先生, 性潭)이 지은 묘지(墓誌)를 보고 공의 명성에 감복한 지 오래이니 지금 그 5대손 종식(宗植)이 나에게 찾아와서 정려(旌閭)의 기문(記文)을 청한다. 선의(善誼)를 미루어 생각하면 감히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다. 드디어 평소에 느낀 바를 대략 이와 같이 쓴다. 그 학문에 힘쓴 것은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여기서 굳이 덧붙여 쓰지 아니한다.

임진년(1892) 천중절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은진(恩津) 송근수(宋近洙)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