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진백(河鎭伯)  1741년(英祖 17) ~ 1807년(純祖 7)

 

공의 초휘(初諱)는 진극(鎭極)이고 자(字)는 자추(子樞)이며 호는 국담(菊潭)이다. 단지공 협(悏)의 육대손으로 처사공 응회(應會)의 손자이고 죽와공(竹窩公) 일호(一浩)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남달라 세 살에 글자를 깨우치고 여섯 살에 능히 부시(賦詩)를 하였다. 소년시절 문충공 하륜 선생의 재실인 오방재에서 글을 읽으며 포부를 키웠고 부모의 명으로 1790년(正祖 14) 진사시에 입격하고 다섯 차례나 입시(入侍)하여 남다른 대우를 받았으나 정조 임금의 급서(急逝)로 노론이 득세하면서 큰 뜻을 펼칠 수 없었고 평생 학문에만 힘쓰더니 1804년 덕천서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공의 벗인 국헌(菊軒) 이공(李公), 눌헌(訥軒) 박공(朴公) 등은 한 시대의 이름난 학자들인데, 이들은 매양 공이 재상의 그릇인데도 산림에서 늙고 있음을 탄식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목재(木齊) 이삼환(李森煥 : 李瀷의 문하생) 등과도 친교를 가졌는데, 다산(茶山) 정약용이 공을 두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단산(丹山)의 한 구비 그윽한 곳에 살면서,    丹山一曲寄幽居

백수(白首)로 궁구(窮究)한 경(經)을 누구에게 물었던가?   白首窮經問孰如

고요히 앉아 안회(顔回)의 즐거움을 찾을 뿐이고,  靜坐且尋顔氏樂

여생(餘生)은 모두 회옹(晦翁 : 朱子)의 글에 의지했네.    殘年都付晦翁書

간아(澗阿 : 내와 언덕)의 일월(日月)속에 고침(高枕)을 베고 있어, 澗阿日月惟高枕

경락(京洛 : 서울)의 진애(塵埃)라도 소맷자락에 물들지 않으리.    京洛廘埃不染裾

이 몸이 있을 곳 어디인지 알려거든,  要識此身休歇處

미원(渼園)의 꽃나무가 내 집이라오.  渼園花木是吾廬

 

라고 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의 그림자를 비춘 것이다”라고 하였다.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는 이르기를, “두 번이나 시연에 들어갔고 이름이 선부(選部)에 올랐는데, 그의 온포(薀抱)를 베푼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세도(世道)를 한결같이 개탄할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집 주변에 작은 못을 파고 주변에 국화를 심어 가을이 되면 국화꽃이 피어 시구(詩句)를 찾느라 매일 밤에 뜰을 산보하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렸으니 공의 호(號)도 이에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공이 하세(下世)한 해에 대부분의 국화 역시 말라죽었는데 공의 계씨(季氏 : 鎭中)가 글을 써서 국화를 위로하자 다시 소생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가사(家史)에 빛나고 있다.

 

배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식(栻)의 따님과 성주여씨(星州呂氏) 홍국(弘國)의 따님으로 2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낙옹(樂翁) 태범(泰範)과 한시당(恨是堂) 정범(鼎範)이다. 참봉(參奉) 정각(鄭墧)이 행장(行狀)을 짓고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가 갈명(碣銘)을 찬(撰)하였으며 문집 『국담집(菊潭集)』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