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승해(河承海)  생졸 미상

 

 

공의 조부는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병판공 휘 거원(巨源)이고, 부친은 병판공의 숙자(叔子)로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된 참판공 휘 을부(乙桴)이다.

 

공은 공민왕대에 문음으로 무관직에 나아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을 때 여려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조선 왕조 개국 후에는 중앙군의 여려 보직을 거쳐 장군의 직위에 올랐다.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중앙군의 장수 대부분이 정도전의 당여(黨與)로 지목되었기에 공도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가 그 뒤 풍해도(황해도) 수군에 충군(充軍)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풀려나 복직되었고 그 후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라 태종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전토(田土)와 노비까지 하사받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미두(米豆)와 지촉(紙燭)의 부의가 내려졌다. 세종 조(朝)에 아드님 양정공(諱 敬復)의 현달로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의 배위는 보성선씨 전객령(典客令) 진기(眞起)의 따님이시고 두 아드님 경복(敬復), 경리(敬履)와 네 따님을 두었다. 아드님 경복은 북방개척에 공을 세워 의정부 좌찬성에 오르니 양정(襄靖)이라 시호가 내려졌고, 경리(敬履)는 성주목사를 지낸 후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따님들은 목사 김각(金珏), 문과 군수 최득경(崔得涇), 단양인 우적(禹跡), 그리고 정지걸(鄭之傑)에게 시집갔다.

 

1932(壬申)년 3월에 사방공사에 나간 사곡(士谷)인 한 사람이 사곡(士谷) 서록(西麓) 허물어진 언덕에서 활꼴의 석물을 발견했는데, 그 석물에 “보성 태부인 선 씨 묘, 정헌 병조판서 진산(晉山) 하승해 처(妻)로 정통 정묘(1447) 12월 21일 에 졸하다. 장자는 숭정 의정부 찬성 경복(敬復)이고 손자는 가선 중추 한(漢)이다. 차자는 통훈 성주목사 경리(敬履)이고 손자는 생원 충(漴)이다. 무진(1448) 2월 초 3일에 이곡(狸谷) 서강(西岡)에 장사지내니 나이 90이었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태부인의 묘는 500여 년 전에 하동읍 문암동(門岩洞) 판서공 묘 옆에 이장되어 500년 동안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부전자(父傳子) 자전손(子傳孫)으로 금일(今日)에 이르고 있으므로 이 석물은 초장(初葬)시에 설치되어 이장(移葬) 때 묻어둔 것으로 추정되어 옛 위치에 다시 설치하여 묘역을 수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