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계효(河啓涍)  1846년(憲宗 12) ~ 1907년(純宗 1)

 

초휘(初諱)는 계형(啓瀅), 자(字)는 해조(海朝)이고 호는 월호(月湖)이다. 단지공 협(悏)의 10대 종손으로 만송(晩松) 치룡(致龍)의 손자이며 처사 석원(錫源)의 아들이다. 재주와 성품이 범상을 뛰어 넘어 5, 6세의 어릴 때부터 이미 독서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13세 때 부친을 잃고 조부 만송공을 따라 황매산 아래 안정동으로 이주했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고헌 정래석(1808년~1893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는데, 고헌은 한강 정 구(鄭逑)의 후손으로 가학을 계승하여 어려서부터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다. 공이 입신양명을 꿈꾸며 과거 준비를 위해 시문에 관심을 보이자 스승 고헌은 “그대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 유학의 학문은 시문에 있지 않고 근본 공부에 힘쓰는 것에 있다”하고 성현의 가르침에 정진할 것을 타이르자 그 때부터 거업(擧業)을 접고 마음을 가다듬어 성현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고 힘썼다.

 

후산(后山) 허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교우(㬔宇) 윤주하(尹冑夏) 등의 현유(賢儒)들과 교유하였으며, 척암 김도화의 문인이 되면서 향산 이만도 등의 강좌(江左)지역 선비들과도 교유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혔다. 면우는 공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 공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공은 후진 교육에 특별히 힘을 쏟았으며 장자(長子) 환식을 후산(后山)의 문하에 보내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1886년 장자 환식이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하며 다시 단목으로 돌아왔고, 향산 이만도에게 부탁하여 단지공의 행장을 새로 갖추는 등 위선사업(爲先事業)에도 주력하였으며 진양하씨 『병신보(丙申譜)』 간행을 주도하였다. 지역 유림의 일에도 적극 동참하여 면우 곽종석, 교우 윤주하 등과 청곡사에 모여 남명 선생 문집 교정의 일에 참여하였으며 산천재에서 남명 선생 문집 간행의 일에도 관여하였다. 『월호유집(月湖遺集)』에 아들 하정근이 지은 가장(家狀), 이중철이 지은 행장(行狀), 최긍민이 지은 유사(遺事), 중재 김황이 지은 묘갈(墓碣)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배위는 전주이씨(全州李氏) 건표(建杓)의 따님과 의성김씨(義城金氏) 진기(鎭基)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환식(煥植), 장식(章植), 재근(在根), 정근(貞根)이고 사위는 파평인 윤창수(尹昌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