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우식(河祐植)  1875년 ~ 1943년

 

공의 자는 성락(聖洛)이고 호는 담산(澹山) 또는 목재(木齋)이다. 창주공의 11세손으로, 효자(孝子) 행정(杏亭) 진태(鎭兌)의 차자(次子)인 사농와(士農窩) 익범(益範)의 차방(次房) 현손으로 단파(丹坡) 계룡(啓龍)의 장자이다. 한말 진주지역 노론계의 대표적 학자이며, 남명학파의 대표적 학자이기도 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민하여 일찍이 조부가 애지중지하며 “장차 우리 집안을 크게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7세 때 배움의 길에 나가 독서에만 힘쓰며 다른 기이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릴 때 공의 일화가 전하는데, “경상우병사 정기택이 촉석루에서 백일장을 열어 공이 동료들과 함께 구경하러 우병사의 집무실인 운주당(運籌堂)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이때 공과 나이가 비슷한 우병사의 아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공을 저지하였다. 우병사가 이를 보고 아들을 불러 질책하고 공에게 사과하면서 공에게 지필을 내리면서 시를 짓게 했더니 공이 붓을 잡고 자리에 나아가니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공은 일찍이 집안 어른인 해산공(海山公) 경휴(慶烋)에게서 과거문(科擧文)을 배워 문장이 뛰어났기에, 1891년 17세 때 의령의 향시(鄕試)에 참여하였다. 이때 향시는 세자 또래의 사람만이 응시자격이 있었는데, 선비들이 나이를 속여 응시를 하고 또 시관과 결탁하여 급제를 하려는 것을 보고는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성현의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소학으로부터 사서, 근사록, 심경, 제자백가 등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1895년 두류산으로 유람을 갔다가 자양서당으로 우산(愚山) 한유(韓愉)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번 보고 서로의 마음이 통하여 세상의 이치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여러 날을 함께 머물렀고, 훗날 우산의 아들 한승(韓昇)을 사위로 삼게 되었으며 우산이 세상을 떠난 후 공은 백곡정사 건립 등 사돈의 학문을 기리는 일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이해 겨울 단발령이 내려지자 공은 덕산 대포촌으로 이주하여 집 한 채를 사서 한포(寒浦)라고 명명하고 학문에 정진했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1897년 옥천으로 가서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를 배알하였을 때, 공을 처음 만나본 입재는 공의 학문에 탄복했다고 한다. 청주에 들러 우암 송시열의 묘를 참배하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을 만나 입신(立身)의 방법을 배웠다. 1901년 덕산 대포에서 다시 옛 집으로 돌아와 강학을 열었는데, 집안사람들과 선비들이 많이 와서 배웠다. 1902년 면암 최익현이 남쪽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 단성의 신안정사에서 뵙고 이어 대원사·촉석루·쌍계사·칠불암 등지를 유람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1905년에 연재 송병선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곡을 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우산과 함께 가서 조문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면암을 뵙고 시의(時義)를 논했다. 이어 공주로 가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만나 수일 동안 머물면서 성리학의 요결을 들었다. 이후 지역의 원로들을 찾아 학문을 질정하였고, 노백헌 정재규, 월고 조성가, 농산 정면규, 송산 권재규 등을 종유하였다.

 

공은 이처럼 당시 노론계 대표적인 학자들을 만나 학문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사계․신독재 전서, 송자대전, 동춘당집, 면암집, 간재집의 간행에도 적극 참여해 1900년대 초반 진주지역 노론계의 대표적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공은 조상을 위한 사업과 창주가의 문헌을 정비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조 창주공이 남긴 문자 상당 부분이 소실돼 20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왔는데, 집안에 전해오는 원고를 수습하고 정리하여 문집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창주공의 손자인 생원공 문집과 사농와집 등 집안 관련 문헌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진양하씨족보 간행에도 힘썼다.

 

진양속지에, “담산 하우식은 계용(啓龍)의 아들이며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다. 어려서 가학정훈(家學庭訓)을 입어 경전(經典)을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하여 일찍이 학문이 성취되었다. 특히 천문(天文), 지리(地理), 병형(兵刑), 정전(井田) 등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특히 14세에 지었다는 포요가, 새마행(塞馬行), 사련가(辭輦歌) 등은 우리 전설(傳說)·고사(故事)를 한역(漢譯)한 것으로 문학성이 매우 높으며 후학 교육에 힘썼다. 일제치하의 모든 행위에 대항하여 거부하였으며 문집(文集) 8권 4책이 전한다.”라고 적고 있다.

 

배위는 연일정씨(延日鄭氏) 감역(監役) 철기(喆基)의 따님과 진양강씨(晉陽姜氏)로 4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해성(海醒) 순봉(恂鳳), 순도(恂圖), 순보(恂寶), 순관(恂綰)이고 사위는 안동 권순장(權淳長), 청주 한승(韓昇), 여흥 민영복(閔泳馥), 안동 권옥현(權玉鉉)이다. 문집 「담산집(澹山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