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준해(河遵海)  1589년(宣祖 22) ~ 1633년(인조 11)

 

공의 자(字)는 백규(伯逵)이다.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현손으로, 증조는 침랑공 취형(就兄)이며, 조부는 참봉공 현령(玄齡)이다. 공은 옥종 월횡에서 휘 수민(秀民)과 진양강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나 당숙 진사공 윤민(潤民)에게서 일찍부터 학문의 요체를 깨우쳤다. 광해 즉위년 인근의 족숙(族叔) 송정 하수일이 이조정랑을 사직하고 낙향하자 그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반듯하게 하라’는 남명의 경의(敬義)사상을 전수받았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1613년(광해 4년)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친 후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금정도(金井道 : 現 청양군) 찰방일 때 여러 일에 뛰어나고 엄정하며 공명정대하였으므로 이민(吏民)이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였다. 1615년(광해 7년)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더니 인끈(紱, 벼슬)을 던지고 향리 월횡으로 돌아왔다. 집을 월봉산 아래에 세우고 편액을 임월재라 이른 다음 자질(子姪)을 훈적(訓迪)하며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기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니 향민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공의 장자 처사공 순(楯)도 학문하는 자세와 수행의 도를 일찍부터 터득하여 문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통덕랑(정5품)의 품계를 받았고 5형제를 두어 그 후손들이 월횡문중을 이루어 양정가(襄靖家)의 구심점으로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