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경복(河敬復)  1377년(禑王 2) ~ 1438년(世宗 20)

 

 

자는 군팔(君八)이고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며 양정공파(襄靖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병판공(兵判公) 거원(巨源)의 증손이고 증참판(贈參判) 을부(乙桴)의 손자며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승해(承海)의 장자(長子)이다. 문음(文蔭)으로 등용되어 무반직에 종사하다가 1402년(태종 2년) 무과에, 1410년(태종 10년)에 무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상호군에 올랐으며 그 후 병마사, 우군총제, 함길도 도절제사,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올랐다. 조선건국 초기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시기에 10년 동안 함길도 도절제사직을 연임하면서 북방을 개척하고 안정시키는 데에 위명(威名)을 떨쳤다.

 

양정공 하경복 신도비문(襄靖公河敬復神道碑文)

 

조선왕조 오백 년간 내치외교(內治外交)에 걸쳐 가장 국력이 신장(伸長)되고 민족문화의 흥륭(興隆)을 이룩했던 시기는 세종대왕 어우(御宇) 삼십년 동안이다. 이러한 치평(治平)의 성과는 당시의 경제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남경북완(南梗北頑)의 외우(外憂)를 해소시킬 수 있었던 데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時期)에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로 수많은 영호현철(英豪賢哲)의 장상(將相)들이 중외(中外)에 활약하여 각기 그 포부와 역량을 당대에 유감없이 발휘하고 그 경륜사업이 후세에 길이 명성(名聲)을 떨치는 이가 많았다.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사 하(河) 양정공(襄靖公) 휘 경복(諱敬復)은 곧 그 중의 한 분이다.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경상도 진주 서면 이하리 지금의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부(父)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증 병조판서 휘(諱) 승해(承海)와 모(母)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장남으로 탄생(誕生)한 공(公)은 남다른 천품(天稟)으로 어려서부터 영채(映彩)가 발월(發越)하였다. 경상도의 저성(著姓)인 진양하씨는 고려 전기의 유명(有名)한 사절신(死節臣) 휘(諱) 공진(拱辰)을 시조(始祖)로 하여 그 후 대대로 잠영문인(簪纓聞人)이 사첩(史牒)에 휘영(輝映)하였고, 조선의 건국(建國)과 더불어 가문이 더욱 왕성(旺盛)하였으니 좌명공신 문충공 호정(佐命功臣文忠公浩亭) 휘 륜(諱崙)은 바로 공(公)의 종조숙부(從祖叔父)였다. 이와 같은 문운(文運)의 비창(丕昌)은 공(公)을 또한 일세의 위인(偉人)으로 진취(進就)케 하였다. 소년 시절 이미 여력(膂力)이 절인(絶人)하고 사어(射御)에 능하여 일찍 간곡(澗谷)에서 사냥을 하다가 뛰어든 맹수(猛獸)를 겨드랑이에 끼고 목을 눌러 물속에서 죽게 하니 이로부터 신용(神勇)으로 알려졌다. 무과(武科)를 거쳐 갑사(甲士)로 숙위(宿衛)할 때에 궁중(宮中)으로 진상(進上)되는 분매(盆梅)의 꽃 한 가지를 꺾어 버리면서 “기화이식(奇花異植)은 인군(人君)의 상지지물(喪志之物)이니 지금 북로(北虜)가 준동(蠢動)하여 어느 때보다 유용(有用)한 인재를 급급히 구해야 할 때에 어찌 이런 물건을 애완(愛玩)할 여가(餘暇)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임금이 듣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410년(太宗 10) 중시무거(重試武擧)를 치른 뒤에 첨총제(僉摠制)에 초수(超授)되고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그해 5월에 길주조전 지병마사(吉州助戰知兵馬使)로 되었다가 6월에 경원병마사(慶源兵馬使)로 옮겼으며 뒤에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에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와 삼군도진무우군총제(三軍都鎭撫右軍摠制)를 거쳐 곧 함길도병마절제사(咸吉道兵馬節制使)로 임명(任命)되었으니 이것이 15년간 북방(北方)에 있어서의 공(公)의 훌륭한 주략(籌略)의 운용(運用)과 뛰어난 노적(勞績)의 달성 과정(過程)이다.

 

원래 여진족(女眞族)은 고려 초부터 우리 함경북부 일대에 점거(占居)하여 계속 문제를 일으켜 왔는데 한때 윤관(尹瓘)의 정벌(征伐)을 통하여 구성(九城)을 쌓은 적도 있었으나 여진(女眞)의 세(勢)에 밀려 그 땅을 도로 내어주었더니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눌러 살면서 틈만 있으면 구략(寇掠)을 일삼았다. 일찍 조정(朝廷)에서 여진(女眞)을 물리치고 육진(六鎭)을 설치할 것을 의론한바 있었는데 정신(廷臣)들은 모두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이에 공(公)은 말하기를 “북방산천(北方山川)은 천험지고(天險之固)가 있고 군사(軍士)와 말이 또한 정강(精强)하니 무슨 두려움이 있는가, 축성(築城)과 설진(設鎭)은 꼭 필요한 일이다.”라고 하여 북방개척(北方開拓)의 열의(熱意)를 보였다. 공(公)은 부임하자 인자(仁慈)스럽게 사병(士兵)을 보살피고 위엄(威嚴)스럽게 노적(虜賊)을 제어(制禦)하여 우리 강역(疆域)의 확보(確保)와 변경(邊境)의 진정(鎭靜)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 정착(定着)에 결정적 전기(轉機)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중요 사실 몇 가지만 든다면, 세종 4년 9월과 10월에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과 올양합(兀良哈)이 차례로 입구(入寇)하였는데 공(公)은 먼저 올양합(兀良哈)에게 사람을 보낸 강온양법(强穩兩法)으로 설유(說諭)하여 피로(被擄)된 경원지방(慶源地方)의 인축(人畜)을 쇄환(刷還)시키는 한편 건주좌위지휘동맹가첩목아(建州左衛指揮童猛哥帖木兒)가 정군(正軍) 일천과 부인 소아(小兒) 공(共)히 육천(六千)을 이끌고 고경원(古慶源)에 입주하려는 것을 엄(嚴)히 거절하여 마침내 아목하(阿木河)로 돌아가게 하였다. 다음해 9월에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이 다시 대군으로 경원고량기(慶源高郞岐) 등 처(處)에 입구(入寇)하는 것을 공(公)이 선두(先頭)에 나서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영격(迎擊)하여 패주(敗走)시키니 적(賊)의 인축궁전(人畜弓葥) 등을 노획(擄獲)한 것이 심다(甚多)하였다. 세종대왕은 공(公)의 큰 공(功)을 기리는 한편 노모(老母)의 곁을 오래 떠나있게 된 공(公)의 심정(心情)을 체념(體念)하여 멀리 진주로 그 모부인에게 능견(綾絹) 각 1필(一匹)과 쌀 삼십 석을 보내고 이어 내관 한홍(韓弘)을 시켜 공(公)에게 어찰을 전하여 그 사실을 알리면서 북방 문제에 공(公)을 장성(長城)처럼 의중(倚重)하고 있음과 임기(任期)가 지나도 교체시킬 수 없는 고충(苦衷)을 말하였다. 2년 뒤 6월에 왕은 다시 모부인에게 쌀 삼십석을 보내고 호군 홍사석(洪師錫)을 공(公)에게 파견하여 궁온(宮醞) 이백십 병과 내구마(內廐馬) 1필(一匹) 의복 1습(一襲) 및 입화(笠靴) 등을 선사(宣賜)하면서 저번 어찰(御札)에서와 같이 모부인(母夫人)을 시봉(侍奉)하지 못함을 위로하는 간곡한 편지를 내렸다. 그리고 공의 아우 휘 경리(敬履)를 진주(晉州) 부근 구읍(九邑)에 차례로 수령직(守令職)에 안처하여 전성(專城)의 장(長)으로 삼고 모부인(母夫人)을 봉양케 함으로써 공이 안심(安心)하고 주변(籌邊)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 9년 3월에 의정부 참찬(參贊)에 오른 공은 10년 정월에 비로소 환경폐견(還京陛見)하여 왕명으로 고향에 계신 모부인에게 귀근(歸覲)하였다. 수월(數月) 만에 또 임지로 향발(向發)하게 되었는데, 왕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전송케 하고 승지대언(承旨代言) 등으로 하여금 내선(內饍)으로 대접케 하는 한편 경상도감사(慶尙道監司)에게 전지(傳旨)하여 모부인에게 또 쌀 삼십석을 내리고 위로의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그 뒤 세종 14년 내직에 들어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고 다음해에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나갔다가 2년 만에 다시 의정부 찬성 겸 의금부제조(議政府贊成兼義禁府提調)가 되었는데 이 기간에 정흠지(鄭欽之) 황보인(黃甫仁)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編纂)하기도 하였다. 한때 함길도 도순검사(咸吉道都巡檢使)로 나갔다가 기민(飢民)의 실태를 보고함에 있어서 숫자의 착오가 있다는 이유로 파직 귀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곧 경상우도 병마도절제사(慶尙右道兵馬都節制使)로 기용(起用)되게 되었는데, 모부인의 봉양에 편리케 함이었다. 62세가 되는 1438년(세종 20) 8월에 별세하니 도인사녀(都人士女)가 항곡정시(巷哭停市)하였고 왕은 조관(朝官)에게 특명하여 공의 거제(居第) 서쪽 수리(數里) 밖에 있는 백석동(白石洞) 오향지천(午向之阡)에 예장(禮葬)으로 묻게 하였다. 공의 거제(居第)는 원래 모옥(茅屋) 수간(數間)이었는데 가인(家人)이 공의 봉록(俸祿)을 비축(備蓄)하여 새집을 웅장하게 지었던바 공은 고향에 돌아와 그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즉시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자서(子婿)와 인리(隣里)의 간청으로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만을 보아도 공의 소지(素志)의 존(尊)한 바를 알 것이다. 배(配) 정 씨와의 사이에 일남 일녀를 두었는데 남(男)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시(諡) 강장(剛莊)인 한(漢)이요 여(女)는 참판 허영(許瑛)에게 출가하였다. 강장(剛莊)은 사남 일녀를 두었는데, 장(長)은 녹사(錄事) 맹보(孟溥)요, 차(次)는 종사랑(從仕郞) 중보(仲溥)요, 차(次)는 아경(亞卿)을 거쳐 자헌지중추(資憲知中樞)로 시(諡) 경절(敬節)인 숙보(叔溥)요, 계(季)는 장령(掌令) 계보(季溥)이며, 여(女)는 찰방(察訪) 조지륜(趙智崙)에게 출가하였다. 오호(嗚呼)라. 공의 일생을 결산하여 태상(太常)에서 시호(諡號)를 양정(襄靖)이라 했으니 갑주유로(甲冑有勞)와 유덕안중(柔德安衆)의 뜻이다. 죽백(竹帛)에 실려 천추(千秋)에 빛날 높고 거룩한 자취가 오직 그의 청백입신(淸白立身)에서 온 것임을 누가 알리요, 여기 짧은 송사(頌辭)로써 명(銘)에 대신해 둔다.

 

남복(南服)에서 태어난 위인(偉人)이 북방(北方)에서 큰 일 하였네. 남북하산(南北河山)이 하나로 트여지는 날 진양의 상서(祥瑞)로운 구름은 누리에 덮이리다.

1985년 을축(乙丑) 중양절(重陽節) 문학박사 여주(驪州) 이우성(李佑成) 근찬(謹撰)

1986년 병인(丙寅) 청명절(淸明節) 방후손(傍後孫) 한진(漢鎭) 근서(謹書)

 

어찰(御札)

세종대왕이 양정공 하경복에게 내린 편지

•세종 6년(1424, 永樂 22년) 11월 29일

내관 한홍(韓弘)을 보내어 유서(諭書)를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에게 주었는데, 이르기를 “야전 생활에 수고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당초에 경이 진(鎭)에 부임할 때, 변방의 경보가 급하여 명령을 받고 바로 떠나 늙은 어머니를 뵈올 겨를도 없었으니, 내 실로 민망히 여겨 일찍이 사람을 보내어 경의 어머니를 존문한 것은 이미 들어서 아리라고 생각한다. 경이 북문(北門)을 수직하면서부터 국경을 방어하는 군정(軍政)은 날마다 잘되어 나가고, 간사한 도적들이 틈을 타고 나왔으나 여러 번 승전을 보고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자못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경원(慶源) 싸움에 경이 몸을 일으켜 단신으로 뛰어나와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워, 드디어 여러 장수들이 앞을 다투면서 역전하여 적을 격파하였으니, 경의 충의에 내가 중하게 의지하는 바이다. 경이 진(鎭)에 있은 지 거의 두 돌이 되어 가니, 규례로는 당연히 갈려서 돌아와야 할 것이나, 나는 생각하건대, 인재가 어렵다는 것을 탄식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거니와, 장수의 임무를 어찌 경솔히 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 군사는 경의 위엄과 은혜에 익숙하고 적도 경의 용감한 병략을 무서워하는데(어찌 경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장수될 만한 사람을 살펴도 경과 바꿀 만한 사람이 없다. 옛날에 송나라 태조 때에 변방에 주둔한 장수로 이한초(李漢超)·마인우(馬仁瑀)와 같은 사람은 모두 그 직에 오래 있어, 혹 수십 년이 되었어도 교대하지 아니하였다. 옛사람의 조처도 실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경은 나를 위하여 머물러서 장성(長城)이 되어, 나의 북쪽을 염려하는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겨울날이 추우니, 근일에 편안히 지내라. 유서를 보내는데 다른 말은 더하지 않는다.”하였다.

 

•세종 8년(1426, 宣德 1년) 6월 8일

호군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에게 서신을 보내고, 인하여 내구마(內廐馬) 한 필, 옷 한 벌과 갓신을 내리었다. 그 서신에, “비바람을 맞으며 들에서 지내니 심히 괴롭겠도다. 경(卿)은 노모(老母)가 멀리 진양(晉陽)에 계시는데, 임인년에 변경(邊境)의 경계(警戒)가 급하였기 때문에 귀성(歸省)하여 어머니를 뵈올 겨를도 없이 명(命)을 받고 즉행(卽行)하였었소. 부임(赴任)해서는 인덕(仁德)으로 군졸(軍卒)들을 위무(慰撫)하고, 위엄(威嚴)으로 적(敵)을 제어(制御)하니, 간악(奸惡)한 도적들은 무기를 거두었고, 변방의 백성들은 편안하게 되었으니, 내가 경(卿)을 의지하여 안온(安穩)하기가 장성(長城)과 같으오. 그러나 경(卿)의 어머니의 기다림과 경(卿)이 어머니를 그리워함이 이미 5년이 지났으니, 내가 어찌 경각(頃刻)인들 잊으리오? 이에, 장수(將帥)를 보내어 경과 교대(交代)하려고 하여 조정(朝廷) 제신(諸臣)과 의논하였으나 실로 그럴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전장(戰場)에서 용감하지 않으면 효(孝)가 아니라’하였은즉, 경(卿)이 진심전력(盡心全力)으로 임금을 만족하게 하니 어찌 효(孝) 중에서도 크다 하지 않으리오! 또 내가 경의 뜻을 받아들여 특별히 경의 어머니를 보살필 것이니 경은 너그럽게 받아들여 나를 위해 충성하기 바라오. 이제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경의 어머니에게 잔치를 내리고, 거듭하여 의관(衣冠)과 마필(馬匹)을 내리니 이르거든 받으시게나. 여름 더위에 억지로라도 많이 먹고 자중자애(自重自愛)하오.”하였다.

 

양정공이 올린 사은전(謝恩箋)

 

•세종 6년(1424, 永樂 22년) 12월 19일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 하경복(河敬復)이 사은전(謝恩箋)을 올려 이르기를, “갑자기 사신이 와서 임금의 권장하는 글을 보니, 혼자서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되어 감격에 넘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더구나, 분수에 넘쳐 그 은혜를 뼈에 새겨 보답해야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외람하게 용렬한 자품으로 일찍부터 넓으신 은혜를 받게 되어, 위험을 피하지 않고 봉사하여 자나 깨나 잊지 않으며, 나라를 위하여 외적을 방어하는데 어찌 감히 어수선하여 어려운 시기에 사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계책이 알맞지 못하여 중책을 위임한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앉아서 1년 이상의 국고를 소비하면서 겨우 한 번 싸우고 서로 물러서게 되어 바야흐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 터인데, 외람하게도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의 한 몸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모친도 또한 영광에 참예하였으며, 운한(雲漢)과 같은 보배로운 글을 내리시고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이 몸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임무를 맡아 성과가 있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정일(精一)하게 중도를 잡고 큰 업적을 이루며, 옆으로 훌륭한 인재를 구하여 여려가지 공적을 백공(百工)에게 베풀고, 국경을 조심하고 튼튼하게 하여 나라의 기초를 영구히 굳건하게 하려는 성대(聖代)를 만나, 신을 가리켜 변방 일을 대강 안다 하시고 신으로 하여금 옛사람에게 비유하시니, 신은 감히 전일에 닦은 바를 부지런히 계속하고 평소에 품었던 뜻을 더욱 굳게 하여, 덕과 위엄을 오랑캐에게 선양하여 어진 사람에게 돌아오게 하고, 변방 백성에게 농업을 권장하여 길이 생업을 즐기도록 하겠습니다.”하였다.

 

•세종 8년(1426, 宣德 1년) 7월 4일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사람을 보내어 사은전(謝恩箋)을 올리니, 그 전문(箋文)에 이르기를, “사신이 뜻밖에 와서 성훈(聖訓)의 포장(褒奬)하심을 보이니, 성상의 은총을 지나치게 입사와 감격의 눈물이 흐를 뿐이옵니다. 분의(分義)를 헤아리옵건대 그 한도를 넘사온지라 뼈에 새겨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외람되옵게도 용렬하고 혼매(昏昧)한 사람으로 일찍이 큰 은사(恩私)를 입었사와, 어떠한 위험이 몸에 미치더라도 군국(君國)에 봉공할 것을 오매(窹寐)에도 항상 잊지 않았고, 나라를 위하여 외적의 모만(侮慢)을 방어하려 할진대 어찌 어지러운 때라하여 그 어려움을 사양하오리까. 다만, 계산의 착오로 위임하신 중책에 부응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노둔(駑鈍)한 힘을 다하여 적의 충돌을 꺾기를 기하였더니, 이제 은사(恩賜)를 더욱 더 하시고, 노고(勞苦)의 위안을 점점 더하시니, 감격함이 지극하매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는 대개 마음을 정(精)히 하시고 뜻을 한결같이 하사, 그 중정(中正)의 도(道)를 잡으시어 큰 것을 돈독히 하시는 것으로 치도(治道)의 법을 이루시고, 널리 준수(俊秀)한 선비를 구하여 백관의 공적을 넓히시고, 강역(疆域)을 매우 공고하게 하여 만세의 큰 기업(基業)을 장대(壯大)하게 하시는 때를 만나, 신이 변경의 일을 조금 안다 하시고, 신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고인(古人)과 필적(匹敵)하게 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전에 닦은 바를 힘써 계승하고 더욱 평소에 지키던 바를 굳게 하여 성상의 덕과 위엄을 추악한 무리들에게 선양(宣揚)하여 끝내 인(仁)으로 돌아옴을 지켜 볼 것이요, 전토(田土)의 경작과 우마(牛馬)의 목축을 변방 백성에게 권장 독려하여 길이 생업을 즐기는 데에 이르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양정공 하경복 졸기(襄靖公河敬復卒記)

 

•세종실록 82권 - 세종 20년 8월 17일

경상도 도절제사 하경복(河敬復)이 졸(卒)하였다. 경복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임오년 무거(武擧)에 급제하여 사복 부정(司僕副正)을 거쳐 누차 천전하여 상호군(上護軍)에 이르고, 경인년에 다시 중시무거(重試武擧)에 합격 첨총제(僉摠制)에 초탁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경원진(慶源鎭)으로 나갔다. 신묘년에 다시 첨총제가 되었고, 임진년에 경성진(鏡城鎭)으로 나갔다가, 갑오년에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로 나갔다. 정미년에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고, 경술년에 판좌군 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승진되었으며, 또 그대로 절제사(節制使)를 겸임하게 하였고, 임자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었다. 북방을 진무하기를 무릇 15년간 하였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 사졸들이 즐겨 그의 쓰임을 받았고, 야인들도 두려워하고 또 사랑해 받들었는데, 진실로 의(義)가 아니면 비록 터럭 끝 만한 것일지라도 결코 취하지 않아서, 야인들이 더욱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으며, 국가에서 그에 의중(倚重)하기를 마치 장성(長城)같이 하였다. 을묘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 찬성이 되었다가 곧 다시 판중추원사가 되고, 병진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더니 얼마 안되어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62세였다.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고, 조정에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관에서 그 장사를 돌봐 주었으며, 시호를 양정(襄靖)이라 하니, 갑주(甲胄)에 노고가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덕으로 회유(懷柔)하여 대중을 편안하게 함을 정(靖)이라 이른다. 경복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용모와 의표가 아름다웠으며 사어(射御)에 능하였다. 그가 함길도에 있을 당시에 부인 정(鄭) 씨가 그의 녹봉을 밑천으로 하여 저택을 세우니, 경복이 돌아와서 못마땅하게 여겨 말하기를, “나는 평생토록 초가집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집을 이렇게 장대하게 세운단 말인가.”하고, 곧 그 철거를 명하였는데, 그의 아들과 사위와 이웃들이 모두 헐지 말라고 간청한 뒤에야 비로소 중지한 바 있다. 이것으로써 대략 그의 마음 세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한(漢)이었다.

 

사제문(賜祭文)

세종대왕 사제 양정공 하경 복문(世宗大王賜祭襄靖公河敬復文)

 

•1438년(世宗 20) 9월 초 8일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제사를 내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풍채와 용모가 괴걸(魁傑)하고 장대하였으며 기도(氣度)와 국량(局量 : 도량)이 너그럽고 여유작작하였다. 어려서부터 손·오(孫吳)의 병법을 배워서 그 재간이 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을 능가하였도다.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아 높이 발탁되었고, 조정을 나가서는 한 지방을 전제(專制)하였고 또는 막빈(幕賓 : 비장)으로서 신기한 지모(智謀)를 운용하여 적도(賊徒)의 기세를 꺾고서 능히 그 침구(侵寇)를 방어하였으니 그 공로와 명예가 실로 혁혁하게 빛났던 터였도다. 부덕한 내가 유업을 이어받고 경의 장략(將略)이 있음을 가상하게 여겨 군부의 수뇌에 앉힌 뒤로부터 나의 주의(注意)가 더욱 돈독하여 이내 북방을 위임하고 그 모든 관할권을 맡겼던바 변지(邊地)에서 운주(運籌)한지 10년에 산융(山戎 : 북쪽오랑캐)이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였도다.

내 그 공적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대를 황각(黃閣 : 의정부)에 오르게 하였더니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 그 능숙한 셈으로 책략을 세우기도 하였다. 지난번에는 다시 경을 번거롭게 하여 남쪽 땅을 진압하게 하였더니 왜구(倭寇)가 지식(止息)되어 경내가 평온해져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농사지어 먹고 살게 하였도다. 무릇 조정과 인민이 함께 저 산악처럼 의중(倚重 : 의지)하는 마당에 어찌 질병 하나로 하늘의 빼앗아 감이 이 같이 빠르단 말이요. 국가의 장성(長城)이 홀연히 무너지니 쓰라린 이 마음을 어찌 견디랴. 이에 예관을 보내어 나를 대신하여 한 잔을 전(奠)하노니 영령이여 앎이 있거든 와서 흠향하기 바라오.”하였다.

 

세종조(世宗朝) 6진(六鎭) 개척과 하경복(河敬復) 장군

 

세종조(世宗朝)의 4군 6진(四郡六鎭) 개척은 압록강 상류지역에서 두만강 하류유역까지 여진족을 몰아내고 남쪽의 백성을 옮겨 살게 한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그곳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수령(守令)을 겸해 그 지역을 조선의 실질적인 행정구역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오늘날 조선전기의 영토 확장과정을 연구하는 사학자(史學者)라면 당시의 북방개척 핵심 인물로 최윤덕(崔潤德)·하경복(河敬復)·김종서(金宗瑞)를 꼽는다. 그러나 국사(國史) 교과서에서는 4군은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과 이천(李蕆) 장군이, 6진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 장군이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들이 평안도와 함길도의 도절제사였던 세종 16년(1434)에서 23년 사이에 대규모의 사민입거(徙民入居)가 실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4군 6진 개척 사업은, 고려 말 원·명(元明) 교체기를 이용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회복한 공민왕의 북진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 초 태조·태종·세종 대에 걸쳐 꾸준히 북방개척을 추진하였던 것이 세종 때 사민정책이 실시됨으로서 그 결실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진(六鎭)은 두만강 유역의 국방상의 요충지에 설치한 군사행정 구역으로,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鎭)을 말하는데, 6진 개척과정의 이해에는 김종서에 앞서 하경복 장군이 세종 4년부터 14년까지 10년간 함길도 도절제사를 연임하면서 여진을 토벌 또는 회유하여 먼저 그 지역을 안정시켰고,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사민정책 수립의 중심에 있었으며 세종 16년에서 18년까지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도순검사(都巡檢使)로 파견되었다는 것이 고려되어야 하므로 그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개국 초 태조 2(1393)년 이지란(李之蘭)을 동북면 안무사(東北面按撫使)로 함길도에 보내 갑산과 경흥 남쪽에 성을 쌓고 여진을 진무(鎭撫)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면 지방을 경략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7년 적극적인 동북면 경략을 위해 정도전(鄭道傳)이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파견되면서 비로소 군·현(郡縣)의 지계(地界)가 정해졌고, 변방 방어진(邊方防禦陣)인 부(府)를 설치하여 경원부(慶源府)라 하였다.

 

태조 때에 잠잠했던 여진족이 태종시대에 들어서자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태종 6년 여진의 우디거족이 경원부 관할의 소다로에 침입하였고, 태종 10년에는 우디거족이 우량아족과 결탁하여 경원부에 재차 침입하였다. 이후 여진은 각 부족을 연합하여 경원지방을 자주 침입하였고, 마침내 경원병마사가 크게 패하게 되자 경원(慶源)의 부(府)를 경성(鏡城)으로 후퇴시켜 경성을 방어의 요충지로 삼게 되었다. 부(府)를 후퇴했으나 여진의 소란은 더욱 심하여 세종 4(1422)년에는 우디거족 수백 명과 우량아족 수백 명이 경성지역까지 수차례 침입하여 경성지역에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마침내 조정의 중신회의에서는 부(府)를 다시 용성(龍城 : 원산 부근)으로 후퇴시키자는 의론이 모아지게 되었는데, 이때 양정공 하경복 장군과 문신 김종서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세종 임금도, “공검(公檢) 이남은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과인의 대(代)에 이르러 지키지 못하고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조종께서 지키시던 곳은 비록 한 뼘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하고 강력한 결의를 천명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유능한 인재를 찾게 되었고, 이러한 때에 하경복 장군이 세종의 의지에 부합하는 인물로 부각되었기에 함길도 도절제사로 제수하였다.

 

이후 장군은 동북면 방어의 총책인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10년간 연임(2년 임기를 5차례 연임)하여 근무하면서 이처럼 긴박했던 여진족 문제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부(府)의 후퇴론’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다. 장군이 국경을 지켰던 10년(세종 4년~14년) 동안은 여진족이 장군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를 못해 대체로 큰 피해가 없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부하 절제사(節制使)들의 패전도 없었고 장군 또한 큰 실책이 없어 문책을 당한 일도 없었다. 무장(武將)으로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문책도 없었다는 것은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인재 발탁의 귀재인 세종의 특별한 지우(知遇)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 14년(1432년) 장군은 여진 출몰의 요해처가 되었던 석막(石幕)을 평정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한 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내직에 들어오게 되었고, 후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성달생(成達生 : 성삼문의 祖父)이 파견되었다. 내직으로 돌아온 다음해인 세종 15년(1433년)에는 장군이 주도하여 문신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황보인(皇甫仁) 등과 우리 실정에 맞는 진법서(陳法書) 「계축진설(癸丑陳說)」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무장(武將)이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세종의 북방개척 의지가 반영된 병서(兵書)라고 할 수 있다.

 

이해에 마침 여진의 우디거족이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그 추장 부자(父子)를 살해하는 등 여진 간에 큰 내분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를 구강(舊疆) 회복의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두만강의 천연적인 험준함을 북변의 경계로 삼고자 유능한 장수를 함경도로 파견하고 싶었으나, 10년간 북방근무를 한 장군을 또 다시 추운 북녘 땅에 보낼 수 없어 대신 강경파 문신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하였다. 이해 12월 장군은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파견되어 함길도의 군정(軍政)과 민정(民政)을 총괄하였는데, 다음해(세종 16년)부터 북방개척 사업을 본격화하여 동북지방 경략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세종 17년에는 김종서에게 도절제사를 맡게 하고 정흠지(鄭欽之)를 관찰사로 보내었으며, 9월에는 장군을 함길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파견하여 여진을 방비(防備)하고 군기(軍器)를 점검하게 하였다. 함길도 도체찰사와 도순검사 기간 동안 장군은 전임(前任) 장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찰사 정흠지와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축조(築造)를 지시하는 등 여러가지 계책을 의논하였다.(김종서는 세종 15년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세종17년에는 도절제사로 전직하여, 4진(四鎭)을 설치한 후 세종 22년 형조판서로 내직에 들어올 때까지 약 8년 동안 함길도에 있었다.)

 

장군의 아드님 강장공(剛莊公) 하한(河漢) 장군도 세종 15년 9월 상호군으로 호군 박배(朴培) 등 30여 명을 이끌고 함길도 갑산(甲山)에서 수자리(戍)살이를 시작하였으며, 16년 5월에는 야인 침노의 첫 길목이며 군사적 요충지인 회령진 첨절제사를 맡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장수의 아들인 까닭에 제수한다.”고 하였으며, 12월에는 이징옥(李澄玉)과 교체하여 영북진 첨절제사를 맡았고, 18년 지종성군사(知鐘城郡事)를 그만둘 때까지 약3년을 개척지역의 첨절제사로 근무하였다.

 

장군은 세종18년 경상우도 병마절제사로 내려가 세종 20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종 16년 종성군(鐘城郡)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두만강유역 개척 사업은 장군이 세상을 떠난 11년 뒤 세종 31년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함으로써 6진 설치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량북(東良北 : 무산)을 제외한 두만강 유역을 거의 수복하게 되었고 회복된 땅에는 삼남지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개척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15세기 말까지 꾸준히 지속하여 두만강 지역을 실질적인 조선의 영토로 경영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