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필도(河必圖)  1678년(肅宗 4) ~ 1755년(英祖 31)

 

공의 자(字)는 응서(應瑞)이고, 강장공의 장자인 녹사 맹보(孟溥)의 10대손이다. 공의 증조부 신국(藎國)이 덕산 양산에서 곤명으로 이거하여 곤명 손량(초량)에 세거하게 되었다. 공의 현달로 조고(祖考) 이청(以淸)은 통정대부 중추부사에 추증되었고, 선고(先考) 인철(仁澈)은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에 추증되었다.

공은 숙종 때 무과에 올라 사천현감 등 여러 관직을 거쳤고 평생에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대절(大節)이 있었으며 충의(忠義)가 늠름하였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 등 소론 과격파와 일부 남인(南人)이 합세하여 노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반란(무신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바탕이 되면서 지방의 사족과 토호 그리고 중간 계층이 호응하게 되어 이인좌는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북상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한편 영남지방에서도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후손인 정희량(鄭希良)이 반란세력에 가세하여 그 세력이 커져 안음·거창·합천·함양 등을 반도(叛徒)들이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 아래 관군이 토벌에 나서자, 전(前) 현감으로 상중이었던 공(公)도 기복(起復)하여 두 아우 응도(應圖), 처도(處圖)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과 합세하여 거창현 소사평에서 싸워 정희량의 반도(叛徒)를 평정하는데 큰 공(功)을 세웠다. 이로써 분무원종훈(奮武原從勳)으로 공신록에 기록되는 녹권(錄卷)을 하사받고 통정대부에 오르니 세칭 일가쌍충(一家雙忠)이라 하였다. 공에게는 응도(應圖), 치도(致圖), 재도(載圖), 처도(處圖), 취도(就圖), 명도(命圖) 등 6명의 아우들이 있었는데 모두 벼슬을 제수 받았다.

 

1719년(숙종 45년) 단목 단지가(丹池家)의 호군공 형(浻), 창주가(滄洲家)의 습정재공 응운(應運) 등이 주축이 되어 진양하씨 대동보 『기해보』를 간행할 때, 사천현감이었던 공이 초계군수 하옥(河沃)과 함께 개보주사(開譜主事)로 참여하여 간행을 도왔다. 『기해보』는 현존하는 진양하씨 문하시랑공계 대동보(大同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사천시 곤명면 손량을 세거지로 하여 초량문중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