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원일(河元一)  1705년(肅宗 31) ~ 1788년(正祖 12)

 

공의 자(字)는 여원(汝元)이다.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7대손으로 찰방공 준해(遵海)의 증손이며 통덕랑 순(楯)의 손자이고 장천공(獐川公) 대희(大熙)의 중자(仲子)이다. 공의 선비(先妣) 밀양박씨는 무과에 급제하여 겸사복(兼司僕)을 지낸 박유장(朴有章)의 따님으로 고성에 거주하였는데 장천공과 혼인하여 공을 사천 장천(獐川)에서 낳았다. 공은 천품이 고매하고 기개와 도량이 컸으며 경근(敬謹)함으로 몸을 수행하였다. 일찍부터 학문적 재질이 있어 지식은 고금을 꿰뚫었는데, 무신란 이후 경상우도의 남인을 탄압하던 시대에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주자학에만 몰두하였다. 증참판(贈參判) 김하현(金夏鉉)의 따님 광주김씨(光州金氏)와 혼인 후 강 건너편인 건지미로 이거하였는데, 이때부터 건지미는 하씨의 250년 세거지로 이어오면서 하씨 양반마을로 예칭 되었다. 건지미에서 한가하게 노닐며 장수(長壽)의 복을 누리더니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중추부사에 작위 되었다.

 

공의 현손 노천공(魯川公) 진도(進圖, 1809~1853)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 일취월장하더니 퇴계의 주리설을 정통학맥으로 잇는 안동을 참된 마음으로 수차례 왕래하면서 정재 유치명의 문하를 출입하였고, 성주에서 이원조를 만난 후부터 거업(擧業)을 접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동년이면서 족숙(族叔)되는 옥종의 월촌 선생을 자주 찾아가 학문을 논하고 선조의 현창사업(顯彰事業)에도 힘써 노력하였다. 불행히도 45세로 조세(早世)하여 학문적 재질을 꽃피우지는 못하였으나 선대에서 계속 저술해온 선대(先代)의 문적을 잘 정리하여 후대로 전하게 하였다.

 

공의 6대손 초산공(樵山公) 빈헌(斌憲, 1871~1954)은 자가 윤장(允章)으로 사천 향교 전교(典校)를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으니 사천지(泗川誌)에,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깨우쳐 명예를 탐하지 않고 은둔하여 원망하지 않았다(得聞爲己不求聲譽遯世不怨)”라고 기록 되어있다. 또한 선대의 세거지인 옥종 월횡을 자주 왕래하면서 백촌 선생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히고 선조의 보본사업(報本事業)과 양정가(襄靖家)의 돈목(敦睦)을 위해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