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달홍(河達弘)  1809년(純祖 9) ~ 1877년(高宗 14)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0대손이며 진희(晉義)의 현손이다. 증조는 의일(義一)이고, 조부는 덕광(德廣)이며 부친은 석흥(錫興)이다. 공의 자는 윤여(潤汝)이고 호는 월촌(月村) 또는 무명정(無名亭)이며 옥종면 월횡리에서 성장하여 7세 때 진사 최중집(崔重集)에게서 배웠다. 공은 풍채와 심정이 엄정하고 문사(文詞)가 섬박(譫博)하며 행의(行誼) 또한 순박하고 독실하였다. 13세 때 진주목사가 덕천서원에서 시행한 백일장에 나가 뛰어난 시재(詩才)를 과시하여 여려 선비들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 공은 문장에 관심이 깊어 한유·유종원·소식 등 당송팔가문(唐宋八家門)을 본보기로 삼아 문장을 지었는데, 한말 대문장가 회봉 하겸진은 공의 시와 문장을 당송팔가의 문장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거유(巨儒)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물재 노광리 등과 도의교로 지냈다. 1859년 노사 기정진이 월횡을 방문하였을 때 월고 조성가, 노백헌 정재규, 계람 최숙민 등과 동석하여 강회(講會)를 갖게 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겸재의 학문 도장인 모한재에서 남명학을 계승하고 많은 후생을 지도하였는데 하씨가(河氏家)의 문하생으로, 공의 장자 이곡 하인수, 양정가(襄靖家)의 월주 하조헌, 송정가(松亭家)의 동료 하재문, 겸재가(謙齋家)의 이곡 하응로 등이 뛰어났다.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이 향교에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향음주례를 시행할 때 공을 주빈으로 초대하니 공이 ‘향음주례서문’을 짓고 행사를 차질 없이 마쳤다. 겸재 하홍도 선생의 문집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겸재 선생의 문집 발간을 주도하였으며, 병인양요로 나라가 어수선하여지자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이른바 위정척사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안동의 정재 유치명 문하를 출입하면서 선조 양정공의 묘갈명을 받아와 양정공 묘소를 정비하는 등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공이 저술한 『태극도주해(太極圖註解)』, 『진학설(進學說)』, 『균부설(均賦說)』, 『동해송변(東海頌辨)』 등은 모두 당시에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성환혁이 묘갈명을 찬하였고, 문인 정기균이 찬한 행록과 공산 송준필이 찬한 행장 및 공(公)의 문집 5책이 전한다. 후손들은 단성면 사월문중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