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달규(河達圭)  1826년(純祖 26) ~ 1895년(高宗 32)

 

공의 자(字)는 여삼(汝三)이고 옥종면 월횡에서 성장하였다. 공은 장령공 휘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휘 응(應)의 10대손이며 휘 영상(榮尙)의 6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해영(海永)이고, 조부의 휘는 덕삼(德三)이며 부친의 휘는 필흥(必興)이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드리니 향도(鄕道)에서 효행상(孝行賞)을 받았고 주위에서 감탄하여 이르기를, “인자(人子)의 도리로서 과연 이와 같이 하겠는가?”하였다. 나이 14세 때 추운 날 어버이가 병들어 창증(脹症)이 매우 심하였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오직 예어(鱧魚 : 가물치)라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하므로 공이 지극한 정성으로 구하여 드리니 어버이의 병이 좋아졌다.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매 이에 글 읽는 것을 폐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여 날마다 망이산(望夷山)에서 나무를 하여 구들을 따뜻하게 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멀리하였는데 어버이를 사모(思慕)하여 그러한 것이었다. 나이 사십에 비로소 장가를 들어 아들 봉수(鳳壽)를 낳았는데, 공이 일찍 학문할 기회를 잃은 것을 스스로 한탄하여 아들에게는 학문을 시켰다. 공의 아들 봉수(鳳壽)는 학문과 효행으로 양정가(襄靖家)를 빛나게 하였다.

족질 이곡(梨谷) 하인수(河仁壽)가 행록을 찬하고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묘갈명을 찬하였다. 후손들이 사곡문중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