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봉수(河鳳壽)  1867년 ~ 1939년

 

공은 장령공 계보(季溥)의 장자 선무랑 응(應)의 11대손이며 영상(榮尙)의 7대손이다. 증조는 덕삼(德三)이고, 조부는 필흥(必興)이며, 달규(達圭)의 독자(獨子)이다. 공의 자는 채오(采五)이고 호는 백촌(栢村)이며 고종 4년 세거지 옥종면 월횡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천품이 영오하고 재기(才氣)가 남보다 뛰어나 유시(幼時)에 이미 문명을 띄었다. 선공(先公)의 효행을 어릴 때부터 보고 익혔으므로 부자(父子)의 효행이 널리 회자(膾炙)되었고, 장성하여서는 사곡리(싹실)로 이거하여 극재 하헌진, 회봉 하겸진, 관료 하영태, 제남 하경락 등 문중의 준재들과 함께 강우학맥의 종장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주리(主理)의 요지를 들었다. 문장이 아름다워 행장과 묘갈명을 많이 찬했으며 평생토록 후생(後生)을 장진(槳進)함이 많았으니 문장과 학행으로 향당에서 추중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유동사문(諭同社文)」을 써서 전 국민이 합심 단결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자고 권유하였고, 이후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여 진주와 거창 다전을 왕래하며 면우 선생을 자주 찾아 시국문제를 토론하였다. 면우 선생이 을미사변 후 미국, 영국 등 각국 영사관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보낼 때, 그리고 한일합방 당시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릴 때 등 스승의 성명서와 상소문 작성에도 일조하였다. 거창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지역의 유림에게 면우 선생의 뜻을 전하였으며, 낙수암에서 족당(族黨)의 여인헌 하재화, 회봉 하겸진 등과 함께 위국충절을 맹세하며 동지동도(同志同道)를 결의하였고 이후 ‘파리장서운동’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영남 유림들은 유림계가 참여하지 못했음을 크게 한탄하다가 유림계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독립항쟁을 주도하고자 했는데 그 대표적인 거사가 ‘파리장서운동’이다. 전국의 유림대표였던 면우 선생이 거창에서 그의 문인(門人)들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빠졌으니 국제 활동의 사명은 유림에서 맡아야 한다고 뜻을 모은 후 전국 유림의 궐기를 주도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우선 면우 선생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은 서명 작업과 활동자금을 준비하였고, 문인 김창숙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거사를 주도하였다. 이때 면우 선생은 “우리의 대의를 펼치는 일을 하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하였고, 공도 “민족을 위해 다 같이 떨쳐 일어나니 어찌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그 해 3월말 심산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이루어진 ‘파리장서(독립청원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밀항하여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보냈으나 의도한 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 장서에 진주 지역에서는 공을 포함하여 싹실가(家)의 회봉 하겸진, 여인헌 하재화, 태계가(家)의 하용제, 대곡의 이수안 등이 서명하였으며 이 일은 몇 달 뒤 일경(日警)에 발각되어 서명한 유림 대부분이 체포되어 수개월의 옥고를 치루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고문 후유증으로 곽면우 선생과 김복동, 하용제 등은 순국하였는데 이 사건을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도 한다.

 

1973년 서울 남산에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세워 서명 유림의 휘함(諱銜)을 새겼고, 정부에서는 1995년 서명한 유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으며, 아울러 2002년 ‘충효실천 운동본부’에서는 공의 항일공적을 후대(後代)에 전하기 위해 큰 바위를 다듬어 ‘유림대표(儒林代表)들이 광복(光復)을 청원(請願)한 파리장서의거(巴里長書義擧)에 동참(同參)한 백촌(栢村) 하봉수(河鳳壽)’라고 새겨두었다.

 

하 열부 분성김씨 정려비(河烈婦盆城金氏旌閭碑)

 

열부(烈婦) 김 씨는 본관이 분성(盆城 : 김해 古號)인 김연갑(金延甲)의 딸이며 진양하공(晋陽河公) 용관(龍寬)의 계배(繼配)이다. 정조 16년 임자(壬子, 1792년) 봄에 용관은 장인(丈人) 연갑과 같이 멀리 놀러갔다가 돌아왔는데, 이틀 만에 창질(瘡疾)에 걸려 돌아갔다. 그 때 열부(烈婦)는 혼인한지 몇 달이 되었지만 시집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약이(藥餌)를 급히 조제(調劑)하여 용관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며 목숨을 끊으려고 하다가 되살아나기를 여러 번 하였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장례를 치를 모든 것을 점검하여 갖추어 보내고 나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은 남편에게는 다행히 전처(前妻)에 아들이 있어 내 몸을 의탁하기에는 충족하니 나의 슬픔을 말리지 마세요.”하였다. 용관의 운구(運柩) 수레를 떠나보내고 또 말하기를, “나는 운구(運柩) 수레를 따라 갈 것이다. 끝없이 반복(反復)하여 가고야 말 것이다. 옛날부터 평시에 딸린 것들은 다 실어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고 말하고는 결국 행장을 차리기 위하여 방(房)에 들어가서는 눈 딱 감고 양 입술 사이에 잿물을 털어 넣고는 입을 다물고 죽어갔다. 이때 용관의 집안사람들은 열부의 시신을 거두어 용관의 영구차와 함께 고향 선산(先山)으로 운구하여 장사지냈다. 열부는 처음에 효도로서 부모를 모신다고 소문이 났고, 그 효도하는 도리가 모두 옮겨가서 남편을 섬기었다. 즉 이것은 정숙(貞淑)한 여인이 강하고 매서운 열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불행한 가운데 격정(激情)하여야 이르게 되는 고(故)로 열부의 착함이 그 안에 있다. 열부는 능히 따라서 해 냈으니 어찌 성실(誠實)하고 현명(賢明)하지 않으리오. 순조 17년 정축(丁丑, 1817년) 암행어사 이화(李墷)가 나라에 정려를 주청하여 사천 건점리에 정려각(旌閭閣)을 수립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이라 비각(碑閣)이 허물어져서 후손 치권(致權) 등이 비석을 세우고 다시지어 수립하기로 모의(謀議)하여, 나에게 거기에 기록할 글을 청하므로 각(閣) 안에 있는 구기(舊記)를 삼가 살펴보니 탄식할 글이로다. 대개 또 다시 이와 같이 쓰지만 늙어서 그 뜻대로 잘 쓰지 못하면서 일러서 명(銘)에 말하노니, 열부의 순수하고 강직한 기백(氣魄)은 정절(貞節)의 보루로다. 하늘과 땅에서 천백 년 이어감을 보게 될 지어다. 이륜(彛倫)의 아름다움은 항상 김 씨(金氏) 부인과 함께 할 것이다. 김 씨의 그 죽음은 오랜 세월 효도했다는 말로서 능사(能事)가 될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남편 따라 순절(殉節)했다는 말로서 부모에게 효도로 돌아갈 것이다. 삶을 버리고 의열(義烈)을 취(取)했으니 그 열(烈)은 빛나리라.

1966年 3月 재령(載寧) 이일해(李一海) 찬(撰) 병서(竝書)

후손 갑주(甲周) 삼가 세움

 

•조선왕조 실록 순조 16(1816)년 7월 2일

예조의 청에 따라 정광로·이경대 등의 효행에 대해 정문을 세워 주다.

예조에서 영남 어사의 별단에 따라 장흥(長興)의 고(故) 학생(學生) 정광로(鄭光露), 상주(尙州) 아전 이경대(李慶大)의 효행(孝行), 진주(晉州) 사인 성사해(成師海)의 아내 정 씨(鄭氏), 사천(泗川) 사인(士人) 하용관(河龍寬)의 아내 김 씨(金氏), 동래(東萊) 장교(將校) 손중일(孫重一)의 아내 강성(姜姓)의 열행(烈行)에 대해 모두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광로는 바로 단종조 때 상신(相臣) 정분(鄭苯)의 아들로 화를 만나 거짓으로 미쳐서 자취를 숨겨 제사지낼 자손을 보존한 자이다. 이조에서 어사의 별도 단자에 따라 경상도 사람 고 부사 박경신(朴慶新), 고 현감 박경전(朴慶傳), 고 첨정 박경윤(朴慶胤) 등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한 가문에 세 사람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