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천서(河天瑞)  생졸 미상

 

호는 망추정(望楸亭)이다. 순천군수(順川郡守) 운수당 윤(潤)의 현손이고 별좌(別坐) 충(冲)의 손자이며 별제(別提)를 지낸 진사 춘년(春年)의 독자(獨子)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전생서(典牲署) 참봉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훈이 있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팔계(八溪) 정면규(鄭冕圭)가 찬한 유사장(遺事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前略)…… 임진왜란 때 망추공(望楸公)은 일개 전생서 참봉으로서 개연(慨然)히 격문(檄文)을 지어 동지사우(同志士友)들에게 통지하고, 집안 하인들을 거느리고 마을 장정들을 모집하여 진주로 달려가서 관군(官軍)을 기다렸다.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듣고 기뻐하며 그 의리와 용기를 격려하고 그의 방책을 들었다. 성이 무너지는 것은 완지(完池)가 얕기 때문이라고 하여 준설(浚渫)하였고, 매복하여 기습(奇襲)하는 계책을 허락하였다. 정조희(鄭調餼)가 기구를 잘 수리하여 강덕룡과 신남에게 맡겼고, 무리를 정성을 다해 대하여 사기(士氣)를 더욱 높였다. 혹 위엄을 펼쳐 세(勢)를 보이기도 하고, 혹 피로해진 틈을 타서 소굴을 무찌르기도 하여 매번 나아가 이기고 돌아오니, 학봉(鶴峰)이 반드시 말하기를, ‘금일 제장(諸將)의 공(功)은 하천서(河天瑞)의 충의로운 격발(激發)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고, 그의 유고(遺稿)에도 또한 이르기를, ‘하천서는 군사 훈련을 잘하였고 적을 잘 헤아렸다.’라고 하였다. 송암(松巖) 이로(李魯)의 용사기(龍蛇記)에 말하기를, ‘하천서는 군사 조련(調練)에 정심(精深)하여 위엄을 떨쳤고, 기율(紀律)이 자못 엄정(嚴整)하였다.’고 하였고, 우산(牛山) 이분(李芬)이 진양성기(晉陽城記)에서 말하기를, ‘하천서의 공이 가장 현저하였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들이 녹훈(錄勳)됨으로써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後略)……”

 

배위는 숙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증판서(贈判書) 안분당(安分堂) 이공량(李公亮)의 따님이고 승문원판교위(承文院判校尉) 창녕 조언형(曺彦亨)의 외손(外孫)이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생질(甥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