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진룡(河震龍)  1605년(宣祖 38) ~ ?

 

자는 계도(啓圖)요, 호는 쌍부헌(雙負軒)이다. 증가선대부 대사마 겸 동지의금부사 경호(慶灝)의 아들이요, 진사 취양(就洋)의 5세손이며, 운수당공(雲水堂公) 6세손이다. 유시남(兪市南, 兪棨)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팔 힘이 절륜(絶倫)하고 기국(器局)이 활달(豁達)하였다. 참봉으로 목관(牧官)이 되었다가 인조(仁祖) 계유(癸酉, 1633년)에 현량(賢良)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장재(將材)로 뽑혀 효종 때 특별히 천거되어 별초관(別抄官) 28수(宿)의 반열(班列)에 들었으며 자못 간성지망(干城之望)이 있어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다. 북벌(北伐) 계획에 참여했는데, 은밀히 큰 계획을 올리고 매우 신중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여러 대신(大臣)들과 함께 임금이 설야(雪夜)에 용검(龍劍)과 초구(貂裘)를 나누어주는 은혜를 입은 까닭으로 이산(理山) 진(鎭)으로 나갈 때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언제 있을지 모르니, 내가 내린 용검(龍劍)과 초구(貂裘)를 반드시 몸에 지니고 또 군마(軍馬)를 조련(調練)하여 언제든 선봉(先鋒)으로 대기(待機)하라.’하였다. 병마(兵馬)를 조련(調練)함에 도백(道伯)이 몰래 장계(狀啓)를 올려, ‘하진룡(河震龍)이 3년 조련(調練)하니 병마(兵馬)가 나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불행히 임금이 붕어(崩御)하는 아픔을 당하여 혼전(魂殿)에 달려가 곡하며 피를 토하고 병이 들었고 인산(因山) 뒤에 더욱 심하여 집에 돌아온 뒤 문을 닫아 손님들을 사절하고 사람들과 접(接)하지 않았으며, 자질(子姪)들에게 북벌에 관한 일은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조 24년(1646년)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