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명상(河命祥)  1702년(肅宗 28) ~ 1774년(英祖 50)

 

초휘(初諱)는 대륜(大崙), 자는 경천(擎天)이요, 호는 이안정(易安亭)이다. 증가선대부 형조참판 모검당(慕儉堂) 한명(漢明)의 아들이요, 통훈대부 행이산군수 진룡(震龍)의 현손이며, 운수당공(雲水堂公) 후손이다.

 

영조 27년 서기 1751년에 무과에 등제하여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통정대부 행 기장(機張) 현감 등을 거쳐서 영조(英祖) 계사(癸巳, 1773년) 우로(優老)의 전법(典法)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공의 현달(顯達)로 증조까지 추증되었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1762년 임오(壬午, 영조 38년)의 큰 흉년에 공(公)이 천(千) 포(包)의 양곡(糧穀)을 내어 사사로이 진휼(賑恤)하였다고 한다.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진양하공 명상지묘

(有明朝鮮國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晉陽河公命祥之墓)

 

선고(先考) 휘(諱) 명상(命祥) 자(字) 경천(擎天)은 계출(系出)이 진양(晉陽)으로 고려(高麗) 때 공신(功臣) 휘(諱) 공진(拱辰)의 후손(後孫)이다. 조선(朝鮮) 조(朝) 벼슬이 지평(持平)이요 호(號)가 운수당(雲水堂)인 휘(諱) 윤(潤)의 십대손(十代孫)이다. 부정(副正)을 지내고 선조(宣祖) 때 호종(扈從) 원종공신(原從功臣) 일등(一等)에 책훈(策勳)된 휘(諱) 경호(慶灝)의 오대손(五代孫)이며 이산군수(理山郡守)를 지낸 휘(諱) 진룡(震龍)의 현손(玄孫)이다. 증조(曾祖)는 휘(諱) 성징(聖澄)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贈職)되었고, 조부(祖父)는 휘(諱) 도형(道亨)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고(考) 휘(諱) 한명(漢明)은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공(公)이 귀(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妣) 증정부인(贈貞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참봉(參奉) 희재(熙載)의 따님인데 증판서(贈判書)로 호(號)가 일두(一蠹)인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이다. 계비(繼妣) 증정부인(贈貞夫人) 진양정씨(晉陽鄭氏)는 통덕랑 호서(虎瑞)의 따님이다. 공(公)은 숙종(肅宗) 임오(壬午, 1702년) 3월 13일에 태어났다. 신미(辛未, 1751년)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여 을해(乙亥, 1755년)에 절충(折衝)장군에 오르고 임오(壬午, 1762년)에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며 계미(癸未, 1763년)에 기장현감(機張縣監)에 제수(除授)되었다. 영조(英祖) 계사(癸巳, 1773년)에 우로(優老)의 전법(典法)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차(陞差)하였으나 갑오(甲午, 1774년) 5월 초7일 정침(正寢)에서 별세(別世)하니 향년(享年) 73세(歲)이다. 고성(固城) 대둔면(大芚面-현 대가면)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했다. 배(配) 증정부인(贈貞夫人) 의성김씨(義城金氏)는 학생(學生) 세적(世迪)의 따님으로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수옹(守顒)의 후손(後孫)인데, 따님 한 분을 두었다. 후배(後配) 증정부인 강양이씨(江陽李氏)는 양복(陽復)의 따님으로 황강(黃江) 희안(希顔)의 후손(後孫)인데, 자녀를 두지 못했다. 삼배(三配) 증정부인 진양정씨(晉陽鄭氏)는 학생(學生) 재항(再恒)의 따님으로 따님 한 분을 두었는데, 배위(配位) 세 분이 모두 사자(嗣子)를 두지 못해서 종제(從弟)의 둘째 아들을 후사(後嗣)로 삼으니 곧 불초자(不肖子) 섭(涉)이다. 큰 따님은 사인(士人) 한응정(韓應鼎)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인(士人) 정경원(鄭慶源, 뒤에 宅善으로 개명)에게 시집갔으며, 부실(副室)의 따님은 통덕랑(通德郞) 조감(趙瞰)에게 시집갔다. 섭(涉)에게는 한 딸이 있으니 통덕랑(通德郞, 뒤에 府使가 됨) 박광우(朴光遇)에게 시집갔다.

숭정 기원후 3을미(1775년) 윤10월    일

불초자 섭(涉) 읍혈(泣血)로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