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한(河   漢) : ? ~ 1460년(世祖 6)

 

 

공은 양정공 하경복 장군의 아드님으로 가업을 이어 무과에 진출하여 무장(武將)으로 회령진 첨절제사, 영북진 첨절제사, 함길도 경력 등 중년시절의 대부분을 함길도에서 근무하며 용맹을 떨쳤다.

세종 29(1447)년 중추원사로 내직에 들어왔으나 곧이어 조모 상(喪)으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세종 31년 야선(也先)이 요동에서 변란을 일으켜 국경지방이 급박해지자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을 받고 황해도 도절제사(都節制使) 겸 황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문종 대(代)에 잠시 중추원과 의정부 등 내직에 근무하였으나 계유정란 후에는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거쳐 경상좌도 도절제사를 지내면서 왜구의 노략질을 차단하는 데 전념하였다.

 

세조 원년에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세조 2년 판중추부사로 승진하여 주로 중추원에 근무하다가 세조 6년(1460년)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 부물과 제전을 내리고 시호를 강장(剛莊)이라 내렸다. 굳세고 과감함을 강(剛)이라 하고 적을 이기는 큰 뜻을 장(莊)이라 한 것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기 50여일 전에 세조 임금이 조회(朝會)에 나와 여러 신하 앞에서, “내가 양녕대군을 보면 사냥이 생각나고, 김구(金鉤)와 김말(金末)을 보면 서적이 생각나며, 하한(河漢)을 보면 정벌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세조 임금의 눈에는 공이 무(武)와 정벌의 상징 인물로 보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시호도 강(剛)과 장(莊)으로 내렸던 것이다.

공은 성품이 호쾌하고 담백하며 싸움에 나가서는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뜻이 충만하였고, 또한 모든 일에서 과감하고 강직하여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지녔던 인물로 전하고 있다.

공의 초배(初配) 정부인(貞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원군(安原君) 안처(安處)의 따님이며 대제학 안문개(安文凱)의 현손(玄孫)이다. 안원군이 공양왕(恭讓王)의 당숙인 경창대군 왕유(王瑜)의 사위이므로 정부인(貞夫人)의 어머니 왕 씨(王氏)는 공양왕(恭讓王)과 재종간(再從間)이다. 공의 후배(後配) 정부인(貞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는 박지한(朴之漢)의 따님이다. 공은 녹사 맹보(孟溥), 종사랑 중보(仲溥), 도총관 숙보(叔溥), 장령 계보(季溥) 등 네 아드님을 두었는데, 계자(季子) 장령공의 후손이 양정공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단종이 강장공 하한(河漢)에게 내린 유서(諭書)

 

지금 혹한(酷寒)을 당하여 매양 변방을 지키는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경각(頃刻)인들 잊을 수 있으랴? 마주하여 위로할 수가 없어 특별히 주연(酒宴)을 내리니 한번 즐거워하기를 바라노라.

 

강장공 하한 졸기(剛莊公河漢卒記)

 

•세조실록 22권 - 세조 6년 12월 26일

동지중추원사 하한(河漢)이 졸(卒)하니 부의(賻儀)와 전(奠)을 내려주었다. 시호(諡號)를 강장(剛莊)이라 하였는데, 강의(剛毅)하고 과감(果敢)한 것이 강(剛)이요, 적을 이기고자하는 뜻이 장(壯)한 것이 장(莊)이다.

 

강장공 하한 묘비명(剛莊公河漢墓碑銘)

 

공의 성(姓)은 하씨이고 휘(諱)는 한(漢)인데 선계(先系)는 진양에서 나왔다. 조부(祖父)는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증(贈) 병조판서 휘 승해(承海)이고, 부친은 의정부 좌찬성 양정공 휘 경복(敬復)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정(鄭)씨이다. 공이 당초에 장헌대왕(세종)을 섬겼다. 왕이 즉위한지 16년 갑인(1434)년에 회령진과 영북진 절제사로 되었다가 얼마 후에 함길도 경력으로 제수되었다. 그때 찬성공(양정공)이 함길도 도절제사로서 도체찰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이 군무(軍務)를 보좌하여 모두 형편에 맞게 하니 여진족 야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순종하여 변경을 시끄럽게 하는 일을 감히 못한 것이 10년이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북방의 일로써 다시 근심하지 않고 성교(聲敎)가 북쪽 변방에 미친 것은 공(公) 부자(父子)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무오년에 찬성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기사년에 황해도 도절제사 겸 황주목사로 제수되었다. 또 공순대왕(문종)을 섬겨서 동지중추원사와 경상좌․우도처치사로 되었고, 공의대왕(단종)을 섬겨서 경상좌․우도 도절제사로 되었다. 그리고 혜장대왕(세조)을 섬겨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임금이 조회에 나와서 여려 신하를 돌아보며, “내가 양녕대군을 보면 사냥을 생각하고, 김구(金鉤)‧김말(金末)을 보면 서적을 생각하고, 하한(河漢)을 보면 정벌을 생각 한다”하였다. 대개 임금의 뜻은 공에게 부친(父親)의 풍도(風度)가 있어 크게 쓸 만한 인물임을 깊이 알고 구태여 염파(廉頗)와 이목(李牧)같은 사람을 구해서 장수 삼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임금의 은총을 받아 6년을 이와 같이 했는데 경진(1460)년 12월 26일 병을 얻어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슬퍼하여 조문(弔問)과 부물(賻物)을 의례(儀禮)대로 하고 강장(剛莊)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굳세고 과감함을 강(剛)이라 이르고, 적을 이기는 큰 뜻을 장(莊)이라 이른다. 공의 배위(配位) 안씨(安氏)는 안원군(安原君) 처(處)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박씨(朴氏)이며 함양이 본관인 지한(之漢)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호(封號)되었다. 아들이 넷인데, 맹보(孟溥)는 제용감 녹사이고 중보(仲溥)는 종사랑이다. 숙보(叔溥)는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서 시호가 경절(敬節)이고, 계보(季溥)는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 벼슬을 했다. 묘소는 하동 섬진강 옆 화심동(花心洞) 감좌(坎坐) 둔덕에 있고 박씨 부인과 무덤을 함께 했다.

공의 후손들이 공의 무덤이 대부(大夫)의 의제(儀制)에 모자란다는 것으로서 슬퍼하다가 이번에 힘을 모아서 높은 비를 세우기로 의논한 다음 겸진(謙鎭)에게 그 사실을 서술하고 시(詩)를 붙이도록 부탁하였다.

 

우뚝하도다 양정공(襄靖公)이여   屹屹襄靖(흘흘양정)

나라위해 마음과 몸 다했네   盡瘁王國(진췌왕국)

북방에 부임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如北有準(여북유준)

백성위해 국경을 철통같이 지켰네     爲厥鎖鑰(위궐쇄약)

북쪽 오랑캐들은 도망하여    朔醜駾矣(삭추태의)

숨만 쉴 뿐이네  惟其喙矣(유기훼의)

변방의 호란(胡亂) 깨끗하게 없어지니     邊煙淨息(변연정식)

모여드는 사람들 그치지 않네     歸市不止(귀시불지)

양정공을 닮은 공(公)은  有肖惟公(유초유공)

한홍(韓弘)보다 휼륭하네     若武于弘(약무우홍)

네 조정(朝廷)을 두루 섬겼지만   歷事四朝(역사사조)

나라의 어려움 한결같이 극복하니     夷險如一(이험여일)

임금이 큰 공을 기려     王嘉乃績(왕가내적)

중요한 직책에 발탁하셨네    擢置機密(탁치기밀)

밝고 성스러운 임금께서는    先王明聖(선왕명성)

그대가 오직 믿을만한 옛 신하이니    爾惟舊臣(이유구신)

그대의 계책을 장대하게 하여     克壯爾猷(극장이유)

나를 도우라고 하셨네    毗予一人(비여일인)

오랑캐를 토벌하는 생각은    征討之思(정토지사)

수고로움 생각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네  無勞拊髀(무노부비)

죽음을 슬퍼하는 예의에 은전이 있었으니  崇終有典(숭종유전)

태상시(太常寺)에서는 시호를 의논했네    議諡太常(의시태상)

강함과 꿋꿋함으로서     發强剛毅(발강강의)

백 사람 몫을 담당했네   百夫之防(백부지방)

아 봉분을 우러러 보니   粤瞻斧堂(월첨부당)

화심동(花心洞)의 꽃받침이네     花心之跗(화심지부)

그 아래는 섬진강이며    其下蟾江(기하섬강)

기상은 지리산을 인접했네    氣接方壺(기접방호)

지리산은 우뚝하고   方壺嵂嵂(방호률률)

섬진강은 흐르고 흐르네  蟾江沄沄(섬강운운)

밝으신 영령은 어제와 같으니     明靈如昨(명영여작)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終古不諼(종고불훤)

 

후예(後裔) 겸진(謙鎭)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