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거원(河巨源)1301년(忠烈王 27) ~ ?

 

 

공은 시조로부터 9세(世)이다. 진강군(晉康君) 휘 식(湜)의 둘째 아드님이며,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 시(諡) 문정공(文貞公) 휘 시원(恃源)의 아우이다.

 

공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갔으나 영명(榮名)을 생각하지 않고 전객시 령(令)을 치사(致仕)한 후 향리(鄕里)로 돌아와 자손을 교훈하였으니 그 덕화(德化)가 향당(鄕黨)에 미쳤다. 이로써 누대(累代)의 후덕(厚德)이 축적되어 자손들이 번성하고 현달하여, 공은 순충익조공신(純忠翊祚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진천군(晉川君)의 봉호(封號)를 받았다. 배위는 사온서령을 지낸 진양정씨 경(瓊)의 여(女)이며 6남 2녀를 두었다. 장자(長子)는 충목왕 즉위년에 장원급제하여 1등 공신에 올라 청천군(菁川君)의 봉호를 받은 을지(乙沚)이고, 둘째는 비순위 정용낭장을 거쳐 문한직(文翰職)의 으뜸인 한림원 학사에 오른 을숙(乙淑)이며, 셋째는 판군기감사를 지낸 후 병조참판에 증직된 을부(乙桴)이다. 넷째 을순(乙洵)은 중랑장을 지낸 후 시중(侍中)에 증직되었고, 다섯째 을빈(乙玭)은 해령(海領) 천호(千戶)였고, 여섯째 을정(乙汀)은 전구서(典廐署) 승(承)이었으며, 서자(庶子) 을생(乙生)은 산원(散員)이었다.

 

공의 장녀는 목사 박 응(朴膺)에게 시집가 2남 2녀를 두어 중추공 하결(河潔 : 문효공의 아우)을 큰사위로 삼았으며, 공의 차녀는 봉상령 강로(姜璐)에게 시집가고, 서녀(庶女)는 강시중에게 시집갔다. 중추공 하결(河潔)이 공의 외손서(外孫壻)이니 중추공의 후손인 남해현령 하신(河紳), 겸재 하홍도(河弘度), 신당(新塘) 하공헌(河公獻), 태계 하진(河溍) 등은 공의 외외후손(外外後孫)이다.

 

하거원공(河巨源公)이 아들 얻은 것을 축하하는

시권(詩卷)의 서(序)

 

전라도 원수(元帥) 밀직(密直) 하을지(河乙止) 공이 전라도 진영에 부임한 이듬해 봄에 그의 종사관(從事官) 박원빈(朴原賓)이 도전(道傳)에게 말하기를, “하공의 존대인(병판공)께서 18세에 을지공을 낳으셔서 을지공이 지금 장상(將相)의 지위에 있는데 그 존대인은 아직도 건강하고 병이 없어 76세에 또 아들을 얻었습니다. 같은 읍(진주)에 사는 옛 재상 하즙공(河楫公)이 가장 먼저 시를 읊어서 축하하니, 진주의 글 잘하는 선비들도 모두 시를 지어 축하하였는데, 그대는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이르기를, “생각건대, 성덕군자(成德君子)는 몸소 후덕(厚德)을 쌓아 조상의 은덕(恩德)에 보답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 연후에야 자손이 번성하고 창대(昌大)하게 되어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가 그 집안에서 나와 도(道)를 얻어 백성을 편하게 구제(救濟)하여 능히 한 가문의 복이 온 나라의 복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부터 ‘사람은 반드시 그 자손의 성(盛)함을 원한다.’고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불궤(孝子不匱 : 한 사람이 효도를 다하면 이것에 감화되어 잇달아 효자가 나온다.)라 하였고 또 영석조윤(永錫祚胤 : 대대로 복된 아들을 준다.)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후덕(厚德)의 도리이다.

 

을지공(乙沚公)의 존대인(尊大人)은 영명(榮名)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 자손을 교훈하고 나아가 덕화(德化)가 향당(鄕黨)에 미쳤으니 그 후함이 축적된 불식지보(不食之報 :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부귀를 누리는 것)가 아니리오. 공이 글 읽은 형통(亨通)한 선비로서 과거를 보니 뛰어난 인물로 다사(多士)의 으뜸(장원급제)이라 벼슬길에 나아가서 장상(將相)이 되기까지 내·외직을 역임하여 평탄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은 절조(節操)로 영문(令聞 : 名望)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비록 가정의 교훈에 근본(根本)된 것이지만 그 역시 하늘이 성덕(盛德)에 보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하씨(河氏)의 돈독하고 후덕(厚德)한 마음씨에 쏠려 또 늦게 좋은 아들을 낳게 해서 그 사(賜)함이 이어져 무궁함을 보인 것이다. 나는 진주의 문사(文士)들이 이번 노래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 장상(將相)의 자리에 오르고 부귀를 누리는 것을 하늘이 기왕에 베푼 것이거늘 어찌 뒤엔들 돌보는 데 인색하리오.”하였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