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치천(河値千) : 생졸 미상

 

자는 중청(仲淸)이요, 한성 판윤을 지낸 유(游)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지명(之溟)이고 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비(備)이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나고 문장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벼슬은 별시위 사과(司果)를 지냈다. 사과공파(司果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치천(値千)이요 자는 중청(仲淸)이다. 진양하씨는 고려 평장사 공진(拱振)을 시조로 하여 여러 대를 내려와서 진강부원군 휘 시원(恃源)은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휘 유(游)에 이르러 조선조에 벼슬을 하여 한성판윤이 되었으니 곧 영의정 문충공 하륜의 종제(從弟)로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지명(之溟)으로 초계 군수를 지내며 치적이 있었다. 부친은 비(備)로 선략부사직(宣略副司直)을 지냈다. 모친은 공인(恭人) 현풍곽씨로 삼남을 두었는데 공은 둘째이다. 어려서 자질이 남달라 자라서 학문을 좋아하여 형제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여 매진해 예업(藝業)을 크게 이루었다. 세조조(世祖朝)에 사과별시위(司果別侍衛)로 등용이 되고 형과 아우 모두 과거에 올랐으니 당시 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명예가 있었다. 공은 이미 출사하여 벼슬길이 열려 있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가들을 따라 영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생질인 상국 남곤(南袞)이 정권을 잡고 여러 번 공을 발탁해 중용하고자 했으나 공이 강력하게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벼슬을 그만두고 몸을 깨끗이 하고자 형과 동생을 따라 점필재 김종직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김 선생이 외우(畏友)로서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직공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양보하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산속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밀양의 대항산의 산수가 빼어나다는 것을 듣고 머물러 살 곳을 정하였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이곳에 우거를 했으나 공은 평상시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고 말하기를 “진양 땅은 우리 관향으로 여러 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오래 떠나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수곡 효동으로 돌아와 수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을 뒤쪽 신향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으니 모부인 묘소 아래이다. 부인은 영인 전주최씨로 공과 쌍분이며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풍은 안의현감이며 차남 개는 후릉참봉이다. 장손은 진사 종악으로 일찍이 남명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남명 선생이 그 재주를 아껴 조카사위로 삼았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세상을 떠난 후 집안이 대대로 미미해 묘문(墓文) 등이 많이 남아 있지 못했다. 공의 후손 동근(東根) 씨가 이를 개탄하면서 신축년에 형 재근과 족숙 영환 씨와 의논하여 많은 돈을 들여 공을 위하여 재실을 지어 숭모하는 곳으로 삼고 또 제전(祭田)을 넉넉히 마련하여 제사 준비를 다 마치고, 동근 씨가 또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공의 묘갈이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를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었으니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재근 씨가 비용을 들여 비석을 마련하였다. 돌이 갖추어지자 동근 씨가 유사(遺事)를 서술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대개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어 사적이 이미 많이 없어지고 또 생졸 연월일도 전하지 않으니 안타깝다. 그러나 큰 선비 문하에 종유하여 외우(畏友)로 허여한 것을 볼 때 공의 학행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간사한 사람들의 유혹에 응하지 않고 은거를 스스로 감내했으니 공의 절의를 상상할 수 있다. 큰 것이 이미 전하니 작은 것은 전하지 않더라도 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세상에서 공을 평가하는 자는 사적이 간략한 것으로 흠을 삼지 말라. 내 이미 이같이 서술하고 명을 짓기를, 세도를 쫓지 않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네, 어려움을 참고 정절을 지켰으며 살아서는 순리에 따라 섬기다가, 죽어서는 편안했네. 후손들이 삼가 서술하여 옛 것을 바꾸어 새 것을 도모했네. 내가 새긴 것은 진실된 것을 부풀린 것이 아니네.

1972年 임자(壬子) 10월(十月)

성산(星山) 이헌주(李憲柱)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