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윤(河   潤) : 1452년(文宗 2) ~ 1500년(燕山君 6)

 

자는 수부(晬夫)요 호는 운수당(雲水堂)이니 운수당공파(雲水堂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안린공(安麟公)의 증손이고 통훈대부 산음현감(山陰縣監) 순(淳)의 손자요 통정대부 거제현령 계지(繼支)의 독자(獨子)이다. 1477년 생원과 진사 양과(兩科)에 입격하고 14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봉교, 좌랑, 지평 등 여러 직책을 거치고, 1498년(연산군 4년)에 폐비(廢妃) 윤 씨(尹氏)를 입묘입주(立廟立主)하여 추숭(追崇)하려 하자 그 부당(不當)함을 극간(極諫)하다가 출척(黜斥)되어 평안도 순천군수(順川郡守)로 나가 1500년(연산군 6년) 별세(別世)하였다. 1720년 진주(晉州) 정강서원(鼎岡書院)에 배향(配享)되고, 실기(實記)가 전해진다. 묘소는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행우산 묘좌(卯坐)인데, 왕가(王家) 하사품이라고 구전(口傳)되는 묘비(墓碑)와 석상(石像) 두 기(基)는 2012년 12월 27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7호로 지정되었다.

 

묘비문(墓碑文)

 

공의 휘는 윤(潤)이요 자는 수부(晬夫)이며 성은 하씨(河氏)이니, 진주인(晉州人)이다. 증조(曾祖) 안린(安麟)은 벼슬했으나 드러나지 않았고, 조(祖) 순(淳)은 산음 현감(山陰縣監)이요, 고(考) 계지(繼支)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다. 현령(縣令)이 지원사(知院事 : 知承文院事) 박윤창(朴允昌)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卓越)하고 방정(方正)하며 엄격(嚴格)하여 기개(氣槪)와 도량(度量)이 있었으며, 장성해서는 뜻을 바꾸어 전념(專念)하여 수학(受學)했다.

 

정미(147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계묘(1483년)에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선임(選任)되고 겸대(兼帶)하여 사원(史院 : 春秋館)에 보임(補任)되었으며, 이어 봉교(奉敎)에 전임(轉任)되었다가 예조(禮曹)·호조(戶曹)·형조(刑曹)의 좌랑(佐郞)을 역임(歷任)하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승차(陞差)하였다. 강직(剛直)하여 시세(時勢)에 아첨(阿諂) 할 줄 몰랐으므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순천(順川) 군수(郡守)가 되었다. 경신(1500년) 2월에 질환(疾患)으로 군재(郡齋)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享年)이 49세이며, 12월에 진주(晉州) 행우산(行牛山)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판서(判書) 김지경(金之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長男) 취굉(就浤)과 차남(次男) 취양(就洋)은 다 진사(進士)이고, 그 다음 취홍(就洪), 취심(就深), 취연(就演)은 모두 수학(修學) 중이며, 딸은 겸사복(兼司僕) 정보(鄭寶)에게 출가(出嫁)했다. 오호(嗚呼)라, 공은 재행(才行)이 있어 원대(遠大)한 기대(期待)를 받았더니 하늘이 수(壽)를 주지 않고 벼슬 또한 미흡(未洽)하구나! 슬프다, 명(銘)하여 이르노니,

아! 하공(河公)은 현달(顯達)해야 했거늘, 온축(蘊蓄)함은 많았으나 시용(施用)함은 미미(微微)했네. 저 하늘의 소임(所任) 그 누가 주관(主管)하랴? 오직 명수(命數)가 다하여 이에서 그쳤구나!

봉정대부(奉正大夫)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경연(經筵)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정광필(鄭光弼) 근지(謹誌)

 

임사홍(任士洪)의 서용(敍用)을 반대한 상소문

 

•성종 19년(戊申 1488년)

예문관 봉교 하윤 등이 상소하여 임사홍의 벼슬을 거두기를 청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하윤(河潤)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본관(本館)의 일기(日記)를 상고하건대, 무술년에 임사홍(任士洪)이 붕당(朋黨)을 결탁하여 조정을 탁란(濁亂)하게 하자 전하께서 여러 의논을 널리 채택하여 밝게 처단하여 먼 지방에 귀양 보내어 다시 쓰지 아니할 뜻을 보였으니, 대순(大舜)이 사흉(四凶)을 죄주고 공자(孔子)가 소정묘(少正卯)를 죽인 것과 더불어 마땅히 빛을 드리우고 함께 본보기가 되어 만세에 전할 만한 것입니다. 신 등은 그윽이 이르건대, 순임금과 공자는 천하의 큰 성인이신데 사흉과 소정묘와 같은 무리가 어찌 능히 성(盛)한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해롭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간사함을 버리기를 이처럼 심하게 한 것은 성인이 작은 것을 막고 조짐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상(履霜)과 금니(金柅)와 같은 깊은 경계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임사홍에게만 그렇게 아니하십니까? 귀양 보낸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사환(賜環)하시고 또 얼마 되지 아니하여 직첩(職牒)을 내려 주셨습니다.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논박(論駁)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자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 ‘비록 직첩을 내려 줄지라도 마침내 다시 쓰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전하의 말씀이 아직도 신 등의 귀에 있고 사책(史策)에 쓰여져서 무궁토록 전해질 것인데, 이제 그 아비 임원준(任元濬)의 작은 공로(功勞)로써 임사홍처럼 흉하고 간사한 자에게까지 미쳐서 어서(御書)로 녹용(錄用)하였으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임사홍이 교만하여 위를 업신여기고 음흉하게 남을 해치는 정상(情狀)은 전하께서 통촉하시는 바이며 대간과 홍문관에서 자세히 아뢰었으니, 신 등은 다시 덧붙이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지위에 벗어나서 일을 논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함이 아니지마는 감히 말하는 것은, 신 등은 전하께서 20년 동안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티 없는 구슬처럼 밝은 덕이 임사홍의 한 일에 의해 오점(汚點)을 남기게 되어 전후 사책(史策)에서 크게 저오(牴牾)하게 될까 그윽이 애석해 합니다. 전하의 이 일은 어찌 만세에 전신(傳信)할 수 있겠습니까? 임사홍이 전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은 심한데 전하께서는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임사홍을 돌보시기를 이처럼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인(小人)의 진퇴(進退)는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달렸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쾌히 결단하고 유보하지 마시며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