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자아(河自阿) : 생졸 미상

 

초휘(草諱)는 중(重)이요, 자(字)는 향운(鄕雲)이며, 호(號)는 퇴재(退齋)이다. 성품이 돈후(敦厚)하고 학문이 높고 행의(行誼)가 있어 향리에서 추중(推重)하였다. 당세에 명성이 높았던 김우(金佑), 비재(俾齋) 송직(宋直)과 더불어 도의교를 맺고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연산조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점필재 문도였기에 연루되어 유배(流配)로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왔다가 입지(立地)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병조참판 증이조판서 퇴재하공 묘갈명 병서 역해

(兵曹叅判贈吏曹判書退齋河公墓碣銘並序譯解)

 

장사(長沙) 옛 고을의 南쪽인 십리 허(十里許)에 울연(鬱然)한 명당(明堂)은 곧 故 병조참판 증이조판서(兵曹叅判贈吏曹判書)인 퇴재하공(退齋河公)의 의리(衣履)가 감추어 있는 곳이다.공산(空山)의 한 봉분이 초분(草奔)의 사이에 있어 자못 옛날 고관대작의 묘소 같지 않으며 또 옛적에 있는 비석(碑石)은 중절(中折)되며 글자가 다 일그러져 가히 읽을 수가 없다.

 

그 후손(後孫)인 상필(相弼)과 양순보(陽淳甫)가 더욱 오래될수록 매몰될까 크게 두려워하여 종중(宗中)에 의논하여 다시 빗돌을 마련하여 묘도(墓道)에 표현(表現)케 함에 강제(康濟)에게 같은 고을에 살고 있으며 또 국조전고(國朝典故)의 상식이 자상스럽다하여 그 천명(阡銘) 글월을 부탁한다.강제(康濟)가 여러 번 글이 부족함으로 사양하나 얻지 못하고 삼가 그 가첩(家牒)을 안찰하여 쓰노니 하씨(河氏)의 선대(先代)는 본관(本貫)이 진양(晋陽)이다.휘 공진(諱拱辰)이요 벼슬이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거란(契丹)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향의하다가 순국하니 평장사(平章事)에 포증(褒贈)됐으며 곧 公의 十二代祖이다.평장(平章)이 휘 칙충(諱則忠)을 낳으니 공부시랑(工部侍郞)이요 시랑(侍郞)이 휘 탁회(諱卓回)를 낳으니 사문박사(四門博士)요 박사(博士)가 휘 정재(諱挺才)를 낳으니 한림학사(翰林學士)요 학사(學士)가 휘 남수(南秀)를 낳으니 검군기감(檢軍器監)이요 군기감(軍器監)이 휘 소(諱邵)를 낳으니 군기소윤(軍器少尹)이요 소윤(少尹)이 휘 부심(諱富深)을 낳으니 문과(文科)에 급제했고 문과(文科)가 휘 식(諱湜)을 낳으니 서승(署丞)인데 증판사평부사(贈判司評府事)요 서승(署丞)이 휘 시원(諱恃源)을 낳으니 녹사(錄事)인데 증판병조사(贈判兵曹事)에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요 진강(晋康)이 휘 윤린(諱允潾)을 낳으니 순흥부사(順興府使)에 증진양부원군(贈晋陽府院君)이요 진양(晋陽)이 휘 윤(諱崙)을 낳으니 곧 호정 선생(浩亭先生)이다.양조(兩朝)에 정책(定策)되고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에 녹(錄)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이 一世에 비견(比肩)할 이 없고 진양(晋陽)의 가벌이 더욱 창대(昌大)했고 시(諡)는 문충(文忠)이다.문충(文忠)이 휘 구(諱久)를 낳으니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요 도총제(都摠制)가 휘 복생(諱福生)을 낳으니 벼슬이 부정(副正)인데 公이 곧 그 아들이다.

 

公의 초휘(初諱)는 중(重)이요 자(字)는 경운(卿雲)이며 호(號)는 퇴재(退齋)이다.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했고 벼슬이 병조참판(兵曹叅判)이다.김점필재 종직(金佔빳齋宗直)으로 더불어 도의교(道義交)가 있었고 도의(道義)와 문장(文章)이 세상에 크게 울리었다.연산 무오(燕山戊午,一四九八) 사화(士禍)에 점필재(佔빳齋)에 연좌(連坐)되어 영광(靈光)으로 귀양와서 미기(未幾)에 졸(卒)하니 중종조(中宗朝)에 병판(兵判)으로 증직(贈職)되었다가 後에 이판(吏判)으로 증직(贈職)되고 겸직(兼職)으로 의례(依例)되었다.자손(子孫)이 미약하여 능히 고향산(故鄕山)으로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무장(茂長)의 동음치면 송운동(冬音峙面松雲洞)의 묘좌유향원(卯坐酉向原)에 권장(權葬)되다. 後에 묘하(墓下)에 사우(祠宇)가 건립(建立)되었는데 선묘임진(宣廟壬辰,一五九二) 왜란(倭亂)에 피소(被燒)되었다. 後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키 위하여 여러 번 예조(禮曹)에 황단(皇端)되었으나 힘이 모자라 중창(重創)을 못했다. 그러므로 자손(子孫)의 통한이 되었다. 이는 하씨 족보(河氏族譜)에 실린 사실이다.

 

이제 公의 세대(世代)를 따지면 四百年이 되었다. 비록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이 있을지라도 어디에서 얻어 징신(徵信)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문충공(文忠公)이 이미 덕업(德業)으로 가문(家門)을 이루었으니 그 후승(後承)이 반드시 번창될 것이 마땅하온대 이제 와서 영체되어 떨치지 못하니 이 무슨 연고인지 公의 배위(配位)는 증정부인(贈貞夫人)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모관(某官)인 돈(敦)의 따님이다.한 분의 아들을 두었으니 응룡(應龍)인데 병조참의(兵曹叅議)이다. 두 분의 손자(孫子)가 있으니 長은 성달(聖達)이니 승의랑(承議郞)인데 양대(兩代)의 묘소(墓所)가 公의 묘하(墓下)에 있고 次는 해달(海達)이다.지금에 十餘世가 아깝게 근근이 내려왔다.

 

公은 문충공(文忠公)의 증손(曾孫)으로 일찍이 대현(大賢)의 문하(門下)에 추종(追從)하면서 한훤당(寒暄堂) 일두(一蠹) 두 선생(先生)을 도의(道義)로 사귀오며 벼슬에 올라 활약하여 장차 크게 쓸모가 있었는데 때마침 혼조(昏朝)를 당하여 南쪽으로 귀양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종세(終世)했다.또 후손들이 서울을 영별하고 해곡(海曲)으로 유락(流落)되어 농사(農事)에 묻히어 능히 떨치지 못하니 어찌 비탄(悲歎)치 않으랴.

 

강제(康濟)의 종선조(從先祖)이신 주계군(朱溪君)이 또한 점필재(佔빳齋)의 문하에서 종수(從遂)하면서 公으로 더불어 환난(患難)을 같이 했으리니 왕사(徃事)를 추억함에 슬픔을 이길 수 없다. 이제 이 역사에 어찌 감히 사묵(舍黙)하고 써 그 청명(請銘)의 부탁을 소홀히 할쏘냐.

슬프다 천운이 순환하사 무왕불복일세 곤도가 박진되어 일양(一陽)이 다시 그 아래에서 난다면 公의 이미 적덕(積德)과 행인(行仁)이 세상에 하욤이 없는 것 같으나 이 상필(相弼) 등 여러분이 다 근검하며 공순하여 그 선조(先祖)를 욕됨이 없는지 능히 그 선조(先祖)의 여경을 거두어 반드시 대대로 이에 이루어질 것이니 내 장차 눈을 씻으면서 기다리도다 이어 명사(銘詞)를 쓰노니

 

높고 높으신 문충공(文忠公)이시여

일찍이 지조(志操)가 수립되어

문충(文忠)의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았도다

점필 선생(佔빳先生)의 고족(高足)으로서

귀양살이 南쪽으로 옮기어졌네

적지(謫地)에 종세(終世)되어 이 땅에 권장(權葬)하니

천리(千里)도 또한 고향(古鄕)이로다

황원(荒原)의 한 봉분은

어진 사람 묻히었네

가는 일이 슬프고 슬프니

고로(故老)들이 전설(傳說)로 이어가네

막막한 송운(松雲)은

감발(感發)됨이 적지 않네

우러러 보건대 저 사우(祠宇)는

임진병선(壬辰兵燹)에 불타버렸네

자손(子孫)이 미약하여

각각 농사(農事)에만 힘쓰네

오는 천억군(千億軍)에

어찌 나의 명사(銘詞)를 징신치 않을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