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항(河   沆) : 1538년(中宗 33) ~ 1590년(宣祖 23)

 

자는 호원(灝源)이요, 호는 각재(覺齋)이니 각재공파(覺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초계 군수(草溪郡守) 지명(之溟)의 5대손이고,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현(現)의 현손(玄孫)이며 생원 풍월헌(豊月軒) 인서(麟瑞)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명으로 후계(後溪) 김범(金範)에게 수학하였고 이후 1556년에 남명 선생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섬겼으며, 음양(陰陽), 의약(醫藥)까지도 모두 섭렵하여 두루 통달하였고 학문과 행실로써 사우들의 추중을 받았다. 1567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참봉에 두 번이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576년 제현들과 덕천서원을 건립하였고, 뒤에 덕천서원 초대 원장이 되어 덕천서원지(德川書院誌)와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찬술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대각촌 각봉(覺峰) 아래로 옮겨 초옥을 짓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쏟았고, 만년(晩年)에는 다시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내복(來復)이라 명명(命名)하고 여기서 생(生)을 마쳤다. 1610년 대각서원에 배향되고 저서로 각재 선생 문집이 있다.

 

묘갈명(墓碣銘)

 

선조 23년 경인(庚寅) 12월 19일 각재 선생(覺齋先生)이 내복당(來復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3세였다. 다음해 신묘(辛卯)년 대각 산중에 장사(葬事)하였다가 후일 수곡 월아동 간좌원(艮坐原)으로 이장(移葬)하였지만 지금까지 삼백 년이 되도록 묘소에는 비석이 없었다. 대개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삼 년 만에 임진란이 일어나 영남이 가장 먼저 적(賊)에게 짓밟혔기에 선생의 저술(著述)과 문적(文籍)이 모두 분실되어 전해지지 아니하고 또 당시 문하의 제현(諸賢) 중 우리 선자(先子) 송정 선생(松亭先生)과 사호(思湖) 오공(吳公)이 친히 수업함이 제일 오래되었으나 언행을 기술하지 않아 후세에 징험할 것이 없었다. 이에 후인들이 비록 흩어진 것을 수습하여 그 유집(遺集)을 간행하고 행장을 지었으나, 이를 근거하여 안본(按本)으로 삼는다면 소략할까 의심스럽고 추론(推論)하여 이야기를 만든다면 참람할까 두려우니, 이것이 지금까지 묘소에 비석이 없었던 까닭이다. 선생의 주손(冑孫) 수진(壽鎭)이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일이란 참으로 후일을 기다려 완비되는 것도 있지만 선생의 실덕(實德)과 가언(嘉言)은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그 전(傳)함이 상실되고, 또 지금은 세도(世道)가 점점 혼란해져 다시 더 기다릴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일언을 베풀어 묘전에 새겨 학자들로 하여금 상고할 바가 있게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항(沆)이요, 자(字)는 호원(灝源)이며 하씨이다. 본관은 진양의 대족으로 고려 절신(節臣) 증평장사(贈平章事) 휘(諱) 공진(拱辰) 이후 대대로 명사(名士)가 이어졌다. 황고(皇考) 휘 인서(麟瑞)는 호(號)가 풍월헌(豊月軒)이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아울러 합격하였고 남명 선생과 벗으로 친했다. 대부(大父) 휘 형(瀅)은 현감(縣監)이요, 6세조 휘 유(游)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풍월헌공(豊月軒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長子) 낙(洛)은 유일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고 선생은 그 차자(次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선공(先公)의 명으로 상주 김후계(金後溪) 범(範)에게 처음 수학하였다. 남명 선생이 덕산에 들어오자 드디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섬기며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 성리(性理)의 여러 책을 배웠으니 조 선생(曺先生)이 나의 벗이라 칭하면서 “내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고 말하였다. 당시 최수우(崔守愚), 오덕계(吳德溪),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 제현이 모두 문하에 있었으니 선생이 날마다 이들과 더불어 강마하여 학문이 크게 진보하였다. 때때로 조 선생을 좇아 천령(天嶺)에서 강개암(姜介菴)을 방문하고 안음(安陰)에서 임갈천(林葛川)과 임첨모당(林瞻慕堂)을 방문하면서 삼동(三洞)의 수석(水石) 경치를 두루 구경하였다. 정묘년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며 신미년 부모상을 연이어 당했으니 상(喪)을 치름에 예제를 다했다. 임신년 조 선생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시묘 중(侍墓中)이었으나 달려가 문안하였으며 세상을 떠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상(喪)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사상례(士喪禮)를 따랐다. 병자년 수우당(守愚堂)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건립하여 조 선생(曺先生)을 향사하였다. 을해년 중 관료들이 동·서당(東西黨)으로 나뉘어 조정이 어지럽고 사습(士習)이 갈라지자 선생은 이를 매우 싫어하여 특립(特立)하여 당의(黨議)에 관여하지 않았다. 침랑(寢郞)으로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임천(林泉)에 자취를 숨겨 경서를 즐기며 전혀 세상에 뜻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임금과 나라를 근심하고 시대와 풍속을 상심하는 뜻이 왕왕 음영(吟詠)에 나타났으며, 또 일찍이 수 만어의 소(疏)를 초하여 시정(時政)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그 무익함을 짐작하고 그만두었다. 선생은 천품이 특출하며 대도(大道)를 일찍 듣고 덕행이 숙정하였다. 그 기상의 청명은 곧 남명이 “설중의 한매(寒梅)”라 하였고, 기량(器量)의 정대(正大)함은 덕계(德溪)가 “처사(處事)에 온건하다”하였으며, 그 절조(節操)의 확고한 지킴은 한강(寒岡)이 말하기를 “각재(覺齋)도 역시 그러하다”하였다. 학문에 이르러선 더욱 공력(功力)을 발휘하였고 글씨에 조예가 깊어 날아갈 듯 생기가 있었으니, 명(明)나라 사신이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심중에는 한 점의 물욕도 없을 것이다”하였다. 집안을 바로잡아 예(禮)를 좋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경(敬)을 지키는 면에서는 선생이 항상 이르기를 “일에는 대소(大小)가 없고 도에는 정조(精粗)가 없다”하면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절 중 일상(日常)으로 행하기에 적합한 것은 쪽지에 기록하여 지니고 다니며 실천했다.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어 조용한 방에서 향을 피워놓고 독서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선생의 매사가 모두 소학에 합치된다 하여 진소학(眞小學)이라 일컬었다. 아! 우리나라 문물(文物)과 유화의 성대함은 참으로 한훤당(寒暄堂) 김문경공(金文敬公)으로부터 비로소 펼쳐졌다. 한훤당(寒暄堂)이 일찍이 시(詩)를 지어 “소학서(小學書)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는다”하니, 필재 김문충공(畢齋 金文忠公)이 평하기를 “이것이 성인되는 근본이다”하였다. 그 후 남명 선생(南冥先生)이 일어나 경의(敬義)의 요지를 깊이 궁구하고 천리를 담론(談論)하면서도 쇄소(灑掃)조차 행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대개 이 또한 한훤당(寒暄堂)의 근본과 같은 뜻이다. 선생은 남명에게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소학에 체득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일찍이 대각촌 각봉(覺峯) 아래에 모옥(茅屋)을 지어 각재라 자호하였고 또 일신재(日新齋)를 지어 학자(學者)를 가르쳤다. 만년에 수곡 옛집으로 돌아와 그 당(堂)을 내복(來復)이라 편액하였으니 학자들이 또 내복 선생(來復先生)이라 칭했다. 배(配)는 대구유씨(大邱柳氏) 현감(縣監) 예원(禮源)의 여식이요, 아들은 경소(鏡昭)이며 사위는 류덕룡(柳德龍)이다. 임진란 얼마 후에 사림이 대각서원에서 선생을 향사(享祀)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명(銘)하기를,

 

행실이 열성(熱成)하고 자질이 청순(淸純)터니, 거듭 명(命)해 불렀으나 은거하여 뜻 구했네, 의심 없이 독신(篤信)함은 사문(師門)의 종지(宗旨)이요, 사문(師門)의 종지(宗旨)는 경의(敬義)가 사업일세. 오직 진실 체득하여 구이(口耳)를 멀리 하고, 도리(道理)에 정조(精粗)없이 정 씨(程氏)와 일치하네. 쇄소(灑掃)와 정의(精義)가 한 이치로 관통하니, 선생의 진소학(眞小學)이 백세토록 이어지리.

종후손 겸진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