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수일(河受一) : 1553년(明宗 8)~1612년(光海君 4)

 

자는 태역(太易)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니 송정공파(松亭公派)의 파조(派祖)이다. 판윤공(判尹公) 유(游)의 7대손이고 초계공(草溪公) 지명(之溟)의 6대손이며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현(現)의 5대손이다. 조부는 생원 희서(希瑞)이며 고(考)는 호조정랑(戶曹正郞) 면(沔)이고 비(妣)는 참봉 조정견(趙廷堅)의 따님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운수당공(雲水堂公) 윤(潤)의 삼남(三男)인 취홍(就洪)의 외손녀이다. 각재(覺齋) 하항(河沆)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쳐 1582년에 단성 향교 성전(聖殿) 중수기를 지었으며 1583년에 덕천서원 세심정기(洗心亭記)와 수우당명, 촉석루중수기를 지었다.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김굉(金㙆)이 지은 묘갈명과 송정문집(松亭文集)이 있다.

 

송정공 하수일 사적비문(松亭公河受一事蹟碑文)

 

송정(松亭) 하 선생은 조선 선조시대에 명덕(名德)을 향유한 진주의 유현(儒賢)이다. 대저 영우(嶺右)의 도학은 산해 선생에 이르러 그 개화기를 형성하였고, 절의의 전통적인 사풍(士風) 또한 이때부터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문(冥門)에는 수많은 위인 석덕(碩德)이 쏟아져 나와 때마침 누란의 위기에 처한 방운(邦運)을 부립(扶立)하였고, 백화가 난만한 성리학의 금자탑도 이 무렵에 최성(最盛)하였다. 각재 선생은 산해문정(山海門庭)의 고족(高足)으로 그 의발(衣鉢)을 전수하였고, 선생은 다시 그 심학(心學)을 전수하여 필생토록 경의의 진전(眞詮)을 유감없이 선양하였으니, 선생은 곧 산해도학의 정맥(正脈)이요, 고문풍(古文風)을 영우(嶺右)에 진작시킨 선구자이다. 당시의 문풍(文風)이 상질(尙質)에 치우쳐 즐겨 쓰던 난삽(難澁)한 진언(陳言)이 도리어 사지(詞旨)를 해친다고 우려한 선생은 간결청아(簡潔淸雅)한 고문의 부흥에 심혈을 쏟아, 편마다 비단을 수놓고 구마다 꽃망울을 토하여, 마침내 시대의 문체를 혁신하고 후도에게 숙율문(菽粟文)을 유여(遺與)하였으니, 선생문집의 진귀함은 부지자(不知者)와 더불어 거론하기 어렵다. 무릇 등림(鄧林)의 미재(美材)는 혹 당일에 칭송받지 못하여도 백세를 기다려 그 비상함을 천하에 과시하고, 곤강(崑岡)의 주옥은 혹 당시에 인정받지 못하여도 천추를 겪으면서 그 진가를 사해에 떨치며, 선생의 문장은 혹 시인(時人)이 주지하지 못하여도 사백 년을 지나면서 그 파란(波瀾)은 암연(暗然)히 일장(日章)하여, 미재나 주옥처럼 광채를 발하니 그 고문풍을 부흥시켰다는 논리가 어찌 과장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선생 문풍은 날로 파급되어 후세를 풍미하였고 지명당(知命堂) 세응(世應), 회봉(晦峯) 겸진(謙鎭) 같은 후손이 층출(層出)하여 고문을 국중(國中)에 폈으니 이 또한 우연하다 하겠는가? 또한 선생의 낙수암(落水菴)은 낙수암(落水巖)에 위치하니 두류 영맥이 완연(蜿蜒)히 남주(南走)하여, 그 오십 리 허(許)에 국사봉이 흘립하고 다시 오리를 굽이쳐 결국(結局)한 당처에 산협의 계수가 합류하여 비류낙하(飛流落下)의 장관을 이룩하니, 이곳이 명승지 낙수암(落水巖)이다. 이 천간지비(天慳地秘)한 곳에 오세손 태와(台窩) 필청(必淸)은 각봉재(覺峯齋)를 이곳에 이건한 바 있고 정조(正祖) 십삼 년 기유(己酉)에는 칠세손 함와(涵窩) 이태(以泰)의 주관으로 일재(一齋)를 창건하여 선조의 우모소(寓慕所)를 조성하니, 물각유주(物各有主)라는 고어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한다.

 

역중에 산처하는 수천 운잉(數千雲仍)이 선생의 당정을 길이 보전하고자 광복(光復) 50년 갑술(甲戌)에 본 암(菴)을 정수하고, 다시 익년엔 선생 사적비를 마련하여, 그 학(學)과 업(業)을 무궁히 천양할 것을 논정하고, 주손(冑孫) 병태(炳台)가 그 문친(門親) 영복(永福) 석근(錫根)과 함께 와서 비문을 인찬(寅巑)에게 청하므로 문득 고루(固陋)함을 잊고 감히 행장을 상고(詳攷)하여 쓰기를, 선생의 휘(諱)는 수일(受一)이요 자(字)는 태역(太易)이며 진주인이다. 시조 고려 충절신 증문하시랑평장사 휘 공진(始祖高麗忠節臣贈門下侍郞平章事諱拱辰)은 거란과의 전쟁에 단신으로 적진에 나아가 삼촌단설(三寸短舌)로 대군을 척퇴시키고 고려혼을 발양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고, 후손이 대대로 현창하여 국중 저족이 되었으며, 문정공(文貞公) 휘(諱) 시원(恃源)은 선생의 구대조(九代祖)이고 이전(二傳)하여 휘(諱) 유(游)는 조선조의 한성판윤이며, 증조(曾祖) 휘(諱) 형(瀅)은 황간(黃澗) 현감이고 조(祖)의 휘(諱) 희서(希瑞)는 성균 생원이니 명 옹(冥翁)과는 도의교가 돈독했으며, 조비(祖妣)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부사 상(瑺)의 여(女)로 부덕을 갖추어 여사(女史), 내칙(內則), 소학(小學), 가례(家禮) 등을 독송하였고, 고(考)의 휘(諱) 면(沔)은 호조정랑이며, 비(妣) 공인(恭人)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참봉 정견(廷堅)의 여(女)로 조선 명종(明宗) 팔년 계축(癸丑) 정월 이십이일에 진주 수곡의 정곡(井谷) 세제(世第)에서 선생을 낳으니, 총명이 탁월하고 진퇴에 절도 있어 조비(祖妣)의 사랑을 다몽(多蒙)하였고, 겨우 해어(解語)할 무렵 조모가 천자(千字)와 사기(史記)를 구전(口傳)하자 그 청일지십(聽一知十)하는 재능에 좌우가 경탄하였다. 칠세에 대학 중용을 습득하였고, 다시 종숙 각재 옹(覺齋翁)에게 사사하여 치지와 격물에 갈력하였으며, 당시는 거세(擧世)가 과문(科文)을 숭상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시체(時體)를 불긍(不肯)하고 오직 고문에 정력을 쏟았다. 선조(宣祖) 십 삼년 경진(庚辰)에 외우(外憂)를 당하기 전에는 누월(累月)의 친환(親患)에 지성껏 시탕하고, 임종 시에는 단지주혈(斷指注血)을 행하였으며, 장후에는 여묘(盧墓)로 종상하였다. 이십 이년 기축(己丑)엔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이년 뒤 신묘(辛卯)엔 문과에 등제하였으며, 임란에는 사직의 망극한 화난을 숙야로 우념한 끝에 동지와 함께 의병 사백(四百)을 모집하여 바야흐로 멸적의 기세가 충천하였으나, 불의(不意)에 종숙 환성재공(喚醒齋公) 락(洛)과 계제(季弟) 경휘(鏡輝)가 전사하고 또한 군량의 궤핍으로 말미암아 해산하여 웅지를 성취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그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우국단충(憂國丹衷)은 잠시도 억제할 수 없었다. 30년 정유(丁酉)에는 선산 인동지방에 유리(流離)하여 길야은 선생(吉冶隱先生) 묘(墓)에 참배하였고, 다시 매부 영천수(榮川守) 이유함(李惟諴) 가(家)에 체류하면서 안동의 도산서원을 참알하고 조월천(趙月川)과도 창수한 바 있다. 익년 무술에 창락찰방에 임하였다가 2년 후에 성균 전적(典籍)을 배하였고, 다시 영산현감(縣監)을 거쳐 38년 을사(乙巳)에는 상주 제독(提督)을 제수 받았으며, 이년 후에 형조좌랑을 배수하였고, 41년 무신(戊申)에는 이조정랑에 승진하였다가 경상도사에 임하였으며 치사 후 수년간을 우유자적(優游自適)하다가 광해군 4년 임자(壬子) 정월 13일에 연수 60으로 몰세하여 수곡의 세성산 자좌원(子坐原) 선조(先祖) 조하(兆下)에 장(葬)하니 우금 383년이다.

 

배(配) 숙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진사 언례(彦禮)의 女로 1녀를 두니 조징송(趙徵宋)의 처(妻)요, 배(配) 숙인(淑人)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참봉 천뢰(天賚)의 여로 3남 3녀를 두니 남은 완(琬) 찬(瓚) 관(瓘)으로 관(瓘)은 출후하고 여서(女婿)는 이육(李堉) 정지(鄭墀) 조징기(趙徵杞)며, 완(琬)의 남은 자온(自溫)이요, 찬(瓚)의 3남 5녀는 자징(自澂) 자호(自灝), 자혼(自渾) 및 정세주(鄭世柱) 강준(姜埈) 이위(李蘤) 윤사정(尹思正) 송정두(宋挺斗)의 처(妻)며, 관(瓘)의 2남 1녀는 자렴(自濂), 자형(自衡) 및 노전(盧洤)의 처(妻)이고, 자온(自溫)의 자는 억(檍)이며 억(檍)의 자는 세희(世熙)니 효행으로 정문을 받들었고, 자(子)는 윤청(胤淸)이며 자는 달중(達中)이고 여(餘)는 불록(不錄)한다.

 

아아! 교악대천(喬岳大川)이 종영하고 육기하여 현인을 탄강함은 곧 하늘의 뜻이니, 장차 대용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선생의 재덕은 국사(國師)로 등용하여 일국의 문정(文政)을 감당할 만 했건만, 등과한 지 미구(未久)하여 미증유(未曾有)의 대란을 만나, 6·7년의 형극생활(荊棘生活)을 겪는 동안 당쟁은 날로 심해지고, 묘당은 장부(藏否)를 구분하지 못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낭서(郞署)를 미면(未免)하게 하니, 따라서 흉장(胸藏)한 대지(大志)를 미전한 채 귀전부(歸田賦)을 읊으면서 임천에 은둔하여 종신하자 이 점을 세인이 지금토록 개탄한다. 하늘이 석학을 내림은 그 무슨 뜻이며, 그 수세를 불우(不佑)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비록 그러하나 선생은 충절의 묘예(苗裔)로 배태하여 도학의 가풍에 함유하였고, 산해의 심법을 전수받아 택심(宅心)과 율신(律身)에 남주(南州)의 귀감이 되었으며, 덕망과 사장이 일세를 지배하였고, 그 사친에는 지체를 봉양함에 괴작이 없으며 이제(二弟)와의 우애는 옛 강굉(姜肱)과 필적할 만했고, 제향을 당해서는 성결(誠潔)을 다하여 기명(器皿)의 세척과 묘우(廟宇)의 청소를 궁행하였으며, 동정에 절제 있고 언소(言笑)에 법도 있어 궤도를 벗어남이 없었고, 교우에 부잡하고 접인에 수성(輸誠)하여 일찍이 애안(崖岸)을 불설(不設)하였으며, 명창정궤(明窓靜几)에 단좌하여 완서(琓書)와 저술로 일생의 업을 삼았다. 또 육처자와 목친족에 그 도를 다하였고, 정사의 시비와 재물의 득실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일문이 연장(連墻)하여 거하되 간언(間言)이 불입하였고, 오직 안분자수(安分自守)와 양졸구원(養拙丘園)을 좌명 삼았으니 그 문교(文交)의 습(習)과 예양의 풍은 옛 최산남(崔山南)과 유하동(柳河東)에 비견할 만하다. 그 문장은 용력함이 깊고 수공함이 멀어 반드시 의리에 근거하여, 전아하고 조창(條暢)하였으며, 시 또한 청원(淸遠)하고 발속(拔俗)하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이제 선생 생애의 개략을 종관하면 생존하여서는 유현으로 추앙받아 그 교화는 만인에게 미쳤고, 몰세하여선 대각서원에 봉안하여 해마다 향사 드리며 경앙하니, 실로 고금 희유(稀有)의 복록이라 하겠다. 누가 첨모(瞻慕)하지 않겠는가. 또 천백 운잉(雲仍)이 경향에 번성하여 인물과 문한이 대대로 부절하니, 이로써 선생의 유방(流芳)과 음덕은 백세에 이르도록 불멸할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이곳을 찾는 행여(行旅) 여러분은 모름지기 이 비문을 정독하고 석면(石面)에 수광(垂光)하는 선생의 사적을 완미하면, 스스로의 성찰에 유익함은 물론이요, 나아가서는 세교(世敎)의 진작에 일조가 되리라 확신한다.

광복 51년 을해(乙亥, 1995년) 춘분절(春分節)

후학(後學)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