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천일(河天一) : 1558년(明宗 13) ~ 1601년(宣祖 34)

 

자는 태초(太初)요, 호는 수긍재(守肯齋)이니 수긍재공파(守肯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현(現)의 5대손이고 생원 희서(希瑞)의 손자이며 호조 정랑(戶曹正郞) 면(沔)의 아들로 송정공(松亭公) 수일(受一)의 동생이다. 종숙부 각재 항(沆)의 문인이다. 선조 12년(157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상운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시문(詩文)에 고묘(高妙)하고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집이 있다.

 

묘갈명(墓碣銘)

 

부군(府君)의 휘는 천일(天一)이요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긍재(守肯齋) 또는 도계거사(陶溪居士)로 송정 선생의 중제이다. 우리 진양하씨는 대대로 덕망 높은 가문으로 진주 수곡 세성산은 하씨의 세장지이다. 부군의 묘는 세성산 뒤 임향(壬向)의 언덕에 있다. 선계는 송정 선생의 묘갈에 잘 드러나 있다. 부군의 형제는 종숙부인 각재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남명 선생의 지결(旨訣)을 듣고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묘갈을 새겨 후대인들에게 보일 만한데,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알맞은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대개 후손들이 쇠미하여 힘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생각건대 부군의 행실의 실상이 오랜 뒤에 혹 상고할 만한 것이 있을까 기다렸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묘갈을 세울 겨를이 없었던 것인데, 그 뒤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 고증할 것이 없게 되었다. 아, 마침내 다시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11대손 정진(禎鎭)이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다행히 묘석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대가 명을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슬프게 여겨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부군은 1558년(嘉靖, 戊午年)에 태어나 22세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유일(遺逸)로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1601년 만력 신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안릉이씨(安陵李氏) 모(某)의 따님(족보에는 喜億의 女)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직장(直長) 경(瓊)과 선교랑(宣敎郞) 장(璋)이다. 큰아들은 후사가 없고 다만 외동딸이 창녕성씨인 성황(成鎤)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선교랑(宣敎郞) 자한(自漢), 주부(主簿) 자황(自潢), 자회(自淮), 자영(自瀛)이다.

 

부군이 세상을 떠난 후 송정 선생이 그 문고를 편집하여 서문을 붙였는데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송정세과(松亭歲課)』 중 시문들이 여기저기 보이나 겨우 약간편이다. 「칠팔구육설(七八九六說)」은 주자(朱子)의 계몽(啓蒙)의 의미를 깊이 발명한 것이다. 아, 이 역시 부군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가학의 연원과 산림의 숨은 덕망을 후예들도 징험할 수 있으니 명을 지어도 부끄럽지 않네.

종후손(從後孫) 겸진(謙鎭)이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