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세희(河世熙) : 1647년(仁祖 25) ~ 1686년(肅宗 12)

 

자는 호여(皥如)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다. 송정(松亭) 수일(受一)의 현손이고 완(琬)의 증손이며, 자온(自溫)의 손자요 억(檍)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이미 알았는데 13세에 부상(父喪)을 당했다. 할머니 진양강씨께서 연로하니 잠시도 곁은 떠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머니의 마음을 살피면서 음식은 반드시 맛을 본 후에 봉양하였으며,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는데 이 때 공의 나이는 겨우 14세였다. 17세 때 우무실(井谷)에서 삵실(士谷, 싹실)로 이주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면서 판윤공 후손들을 싹실하씨로 예칭하게 되었다.

 

공은 겸재 하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예학에 정밀하였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시냇가에 집을 지어 석계정사(石溪精舍)라 편액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일문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진주목사가 맹종읍순(孟宗泣筍)을 제목으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니 공이 한 구절로 이르기를 “사람으로 재차 맹종이 없는데 누가 다시 눈물을 흘리며 겨울철 죽순을 찾겠는가?”라고 하였다. 1682년 어머니 풍천노씨의 병환이 깊어 위독하자 수개월 동안 옷끈을 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날마다 어머니의 변을 맛보며 병의 차도를 살폈으며, 한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목욕한 후 하늘에 빌었다. 상을 당하고 나서는 곡읍(哭泣)하다가 돈절(頓絶)에 이르렀으나 삼가이 일을 마쳤으며, 여묘살이 하면서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여막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산이 깊어 맹호(猛虎)가 많았지만 밤새도록 슬퍼하며 묘를 살피니 호랑이도 해(害)를 끼치지 않았다. 복(服)을 마친 후에는 화려한 옷이나 연한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아니했으며 매양 제사 때마다 비애(悲哀)하기를 마지않았다.

 

공의 배위 현풍곽씨는 전적(典籍) 곽융(郭融)의 따님으로 감사(監司) 곽월(郭越)의 증손이며, 후배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참봉 필백(必白)의 따님이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현손이다. 공은 따님만 넷이고 아들을 두지 못해 단목문중 참봉공 경(憬)의 후손인 응명(應明)의 중자(仲子) 윤청(胤淸)을 입양하였다. 숙종 12년(1686) 40세로 조세(早歲)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유고가 있다.

 

숙종 34년(1708) 경상도 암행어사 이이만(李頤晩)이 공의 효행을 조정에 보고하여 2년 뒤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려졌다. 정려는 구(舊) 대각서원 앞에 세웠으나 6대손 감역(繕工監監役) 재곤(載崑)이 사곡리 사곡부락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이황(李滉)의 후손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지은 정려기(旌閭記)가 있다. 완산인(完山人) 대사간 지제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효자 석계공 정려기(孝子石溪公旌閭記)

 

공의 휘는 세희(世熙)이고 자는 호여(皞如)이며 성은 하씨로 본관은 진양이다. 송정 선생 수일(受一)의 현손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길 때는 성경(誠敬)을 다하였다. 겸제(謙齋) 하홍도(河弘度) 선생을 사사하였고 과거를 포기하고 정밀하게 글을 읽었고 예학은 식산 이만부 공에게 배웠는데 식산공이 석계당 편액을 손수 써 주었다. 어버이의 병을 간호하며 띠를 풀지 아니했다. 일찍이 변을 맛보고 단지(斷指)의 정성을 다하였다. 거상(居喪)할 적에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행하였고 여묘삼년에 호랑이가 감응하는 기이한 일이 있었는데 어사 이공 이만(以晩)이 계문(啓聞)하여 숙종 경인년(1710, 숙종 36)에 정려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통훈대부 전 행홍문관수찬지제교 진성 이가순(李家淳)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