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필청(河必淸) : 1701년(肅宗 27) ~ 1758년(英祖 34)

 

자는 천기(千期)요, 호는 태와(台窩)이다. 송정공 5세손이고 찬(瓚)의 현손이며 지명당 세응(世應)의 아들이다. 영조 14년(1738년) 문과에 올라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쳤으나 시론(時論)에 거슬렸기 때문에 외직(外職)으로 밀려나 경양도(景陽道 : 광주~능주) 역승(驛丞)이 되었을 때 지위가 공의 덕에 맞지 않아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이인좌의 난(무신란, 1728) 이후 당시의 조정을 주도하던 노론(老論)이 남명학의 영향을 받은 영남우도 사림과 남인(南人)을 극도로 탄압하던 시기였기에 미관말직의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은 진주 4재(四齋) 중 관내에 있던 각봉재(覺峯齋 : 西面書齋)를 인근의 낙수암(落水巖) 계곡으로 옮겨 중건(重建)하고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만년(晩年)에 인근 단성의 남사에 거주하던 남계(南溪) 이갑용(李甲龍, 1734~1799)을 문인으로 두어 선고(先考) 지명당으로부터 이어받은 남명학을 전수하였는데, 남계가 다시 남고(南皐) 이지용(李志容)을 문인으로 두었고, 남고는 다시 월포(月浦) 이우빈(李佑贇, 1792~1855)을 문인으로 둠으로써 남명학의 전통을 진주 단성에서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였다.

 

배위는 숙인(淑人)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여보(汝輔)의 따님과 숙인(淑人) 성주여씨(星州呂氏)로 해(楷)의 따님이며 무육(無育)이라 종제(從弟) 현청(顯淸)의 장자(長子) 대중(大中)을 입계(入系)하였다. 종후손(從後孫) 진현(晉賢) 찬 행장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찬 갈명(碣銘)이 있고 문집 태와집(台窩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