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을지(河乙沚) : 1318년(忠肅王 5) ~ ? (1405년 전후)

 

 

공은 고려 후기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치가 문란하자 덕을 숨겨 벼슬을 멀리했던 휘 부심(富深)의 증손이며, 선관서승을 지낸 후 순충보조공신 숭록대부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에 추증된 휘 식(湜)의 손자이다. 부(父)는 전객시 령(典客寺令, 3품)을 치사(致仕)한 후 순충익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진천군(晉川君)에 증직된 휘 거원(巨源)이며, 모(母)는 사온서 령(司醞署令)을 지낸 진양정씨 경(卿)의 여(女)이다.

 

공은 충숙왕 5년(1318) 7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충혜왕 복위 5년(충목왕 즉위년, 1344) 지공거 박충좌(朴忠佐)와 동지공거 이천(李蒨)이 주관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중앙의 여려 관직을 거쳤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자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의 휘하에서 개경수복에 공을 세워 공민왕 12년(1363년)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청천군(菁川君)에 봉작되었다. 이듬해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王譓)이 반원정치를 추진하던 공민왕을 제거하기 위해 최유(崔濡)와 함께 원나라 군대 1만으로 침입하였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북면도원수부(都元帥府)가 봉주(鳳州 : 황해도 봉산)에 주둔했을 때 도원수 경복흥(慶復興)휘하의 진무(鎭撫)로 활약하였다. 당시 현지사정을 급히 상계(上啓)할 일이 생겨 서북면도순문사 이인임(李仁任)과 의논한 후 급히 개경으로 달려가 고하고 왕의 밀명을 구두로 받아 그날 밤으로 즉시 다시 돌아와 도원수에게 전하니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공민왕 17(1368)년 나주목사일 때 신돈(辛旽)에게 조력하지 않아 신돈의 측근인 전라도도순문사 이금강(李今剛)에게 옥정아(玉頂兒)를 빼앗겼다. 공민왕 22년(1373년) 강화 만호일 때는 충정왕(忠定王)에 대한 충절을 지켜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있던 동방(同榜) 아원(亞元) 안길상(安吉祥)이 시(詩)를 지어 보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전해왔다. 그 해에 왜구가 양천을 노략질하고 한양부에 이르러 가옥을 불태웠는데, 한양부윤(漢陽府尹) 신렴(辛廉)이 이를 방비하지 못하여 체복사(體覆使) 이걸생(李傑生)이 공에게도 책임을 물어 장배(杖配)하여 봉졸(烽卒)로 삼았다. 이 때 공의 죄를 가볍게 판결했다는 이유로 이걸생이 죽임을 당했는데 걸생이 형(刑)에 임하여 담소(談笑)하며 태연자약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걸생은 성품이 강직하여 거리낌 없이 말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인데 간신 김흥경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까닭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우왕 1년(1375년)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全羅道元帥兼都安撫使)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이인임 일파의 친원정책(親元政策)을 반대하다가 나주에 부처되었던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공의 진영을 찾아 왔는데, 공의 종사관 박원빈(朴原賓)이 삼봉에게 공의 존대인(尊大人)이 무병장수하여 나이 76에 또 아들을 얻은 사실을 알리니 삼봉이 ‘賀河公巨源生子詩序’로써 존대인의 득남을 축하하였다. 우왕 2년 왜선을 나포한 공(功)으로 의주(衣酒)를 하사 받았으나, 7월 군적을 편성할 때 연호군(煙戶軍)과 별민군(別民軍)을 정원 외로 늘려 편성함으로써 농사에 지장을 주었다는 이유로 파직 명령을 받았다. 이 때 병마사 유영(柳榮)을 후임 원수로 정해 공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왜구가 영산으로 침략하여 전함을 불사르고 다시 나주로 침범하였다. 공은 유영이 도계(到界-道界에 발을 디디면 곧 安撫使의 직무가 시작됨)하였다는 말을 듣고 영(營)을 떠나 진주의 농장으로 돌아갔는데, 왜구들이 이틈을 타서 원수(元帥)의 영(營)에 불을 질렀으나 능히 막아 내는 사람이 없어 크게 패하였다. 이 일에 대한 책임으로 공은 하동현으로 장류(杖流)되어 봉졸(烽卒)이 되었으나 곧 석방하여 계림 원수로 서용되었다.

우왕 6년(1380) 왜군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침입해왔을 때 삼도(三道) 9원수 중의 일인(一人)으로 지리산 일대에서 왜구의 정예부대와 맞섰고, 그 후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목은 이색(李穡)이 공(公)에게 보낸 시에서 공이 용두회(龍頭會)를 마련하였으면 하였는데, 용두회는 당시 문과에 장원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베풀던 연회(宴會)로, 공보다 먼저 장원한 이공수(李公遂) 안원룡(安元龍) 이자을(李資乙) 등과 공(公)보다 뒤에 장원한 김인관(金仁琯) 이색(李穡) 안을기(安乙起) 염흥방(廉興邦) 정몽주(鄭夢周) 박실(朴實) 윤소종(尹紹宗) 이첨(李詹) 등이 참여하였던 것 같다.

 

63세이던 우왕 6년 이후로는 『고려사』 등에서 공의 행적을 찾을 수 없으나, 공과 정도전의 관계 그리고 공의 아버지가 조선 초의 품계인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된 것 등으로 보아 조선 개국이후에도 별도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나 정사(正史)에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태종 5년(1405) 전후에 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의 독자(獨子) 현부(玄夫)는 벼슬이 사직(司直)이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주목(晉州牧) 효자조(孝子條)와 『해동잡록』 등에, “하현부는 효행이 지극하여 향방에서 효자로 칭송되었다. 90세가 된 어머니가 중한 병이 들자 대변을 맛보고 종기를 입으로 빠는 등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였으며, 부모님이 잇달아 돌아가시니 6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의 독손(獨孫) 귀지(貴之)는 적자(嫡子)를 두지 못하고 을손(乙孫)·철손(哲孫)·수손(守孫) 등 서자 세 명을 두었으나, 조선 후기에 서자들의 후손을 보첩에 올리지 않았던 관행 때문에 청천군의 후손으로 대를 잇지 못하였으니 시랑공계 보첩에서 청천군의 후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청천군 관련 사략(史略)

 

•덕흥군(王譓)과 최유(崔濡)의 침입 때 서북면 도원수부진무(西北面都元帥府鎭撫)로 봉주(鳳州)에 주둔하다.

공민왕 12년 원(元)나라 조정에서 공민왕의 친명반원정책(親明反元政策)에 반발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원(元)에 머물던 덕흥군 혜(충선왕의 서자)를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삼고, 원(元)에 시종하던 역신(逆臣) 최유(崔濡) 등을 시켜 요양의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덕흥군을 고려로 호송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재추(宰樞)들과 방어책을 의논한 후 경복흥(慶復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고 여려 장수들과 함께 동북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12월에 덕흥군이 요동에 진을 쳤고 척후하는 기병은 압록강에 이르렀다. 조야(朝野)가 진동하여 두려워하면서도 변방의 장수들이 변심하여 덕흥군에게 동조할까 염려하여 군사 쓰는 방략을 중앙에서 지시하였기에 장수들이 조심하여 스스로 전제(專制)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의주에 있는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安遇慶)과 여려 장수에게 압록강을 건너가서 덕흥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인주(麟州)에 있던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귀수(李龜壽)가 봉주(鳳州)에 이르니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이귀수의 군졸들이 전투에 나가는 것을 꺼려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이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 이인임(李仁任)이 진무(鎭撫) 하을지에게, “우리 군사가 굶주리고 추워서 돌아가기만을 생각하니 어찌 딴 마음이 없겠소. 압록강을 건너는 계획은 참으로 한심하다 하겠소. 그런데 원수는 우유부단하니 내가 다른 일을 핑계하여 원수에게 청해서 그대를 보내 왕에게 현지 사정을 품달(稟達)하도록 하겠으니 그대가 잘 처리하시오”라고 말하고는 곧 ‘이귀수의 군졸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기록한 글’을 하을지에게 주었다. 하을지가 밤낮으로 길을 달려 왕을 알현하니, 왕이 서신을 보고 크게 놀라 미쳐 회답하는 글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속히 강 건너는 일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구두(口頭)로 도원수 경복흥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하을지가 급히 변경으로 돌아가 경복흥에게 왕의 교지를 전달하니 경복흥이 기뻐하며 곧 여려 장수들을 본영(本營)으로 돌아가게 하여 군사들의 동요를 무마하였다.

 

다음해 정월 최유(崔濡)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여러 군대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최유가 선주(宣州)에 입성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최영(崔瑩)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급히 안주로 가서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고, 동북면의 이성계에게 정예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서북면의 군대와 합류하게 하였다. 최영이 군중에 이르러 엄한 군율로 도망병을 참수하니 군령이 숙정(肅正)되었고, 이성계와 이순(李珣) 등 여려 장수들이 와서 합류하니 군세가 강해져 최유의 군대를 토벌할 수 있었다.

 

당시에 진양부원군 하윤린(1321~1380)은 숙주군사(肅州郡事, 肅州 : 평남 평원군)로서 군사(軍士)들이 숙주를 지날 때 지역의 부호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봉록을 덜어 굶주린 군사들을 구하였다.

 

•황산대첩(荒山大捷)

1380년(우왕 6) 8월에 왜구는 진포(鎭浦 : 금강 어귀)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끌고 와 충청·전라·경상의 3도 연해의 주군(州郡)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최무선(崔茂宣)을 시켜 화통(火筒)·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하여 전부 불태우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왜적들은 옥주(沃州 :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는데, 선박을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독기를 품고 상주·영동 등지로 진출하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니 왜구의 피해가 이처럼 극심한 적이 없었다. 이때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 : 지금의 星州)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 : 지금의 함양)에 집결하여 반격해 오니 왜구를 추격하던 3도의 9원수(배극렴, 하을지, 김용휘, 지용기, 오언, 정지, 박수경, 배언, 도흥)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면서 냇물이 피로 물들어 이곳을 피내(血溪)라고 하였다. 왜구가 운봉현을 불지르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여 북상(北上)하려한다고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해주 방면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왜구 대토벌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이성계가 남원에 이르자 배극렴과 하을지 등이 이성계를 맞이하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려 장수들이 부서를 정하고는 다음날 새벽에 동쪽으로 운봉을 넘어 적과 30리 떨어진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 올랐다. 적들이 험지에 자리 잡고 버티다가 이성계가 군사를 지휘하여 공격하니 적들이 죽을힘을 다해 돌진해 왔다. 16세 정도의 적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백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내달리니 우리 군사들이 다투어 피했는데 이성계가 활을 쏘아 그의 투구를 떨어뜨리니 이지란(李之蘭)이 쏘아서 죽였다. 이로서 적의 예기가 꺾이게 되어 적의 정예부대가 전멸하니 적들의 통곡소리가 1만 마리의 소 울음소리와 같았다.

 

청천군 관련 시문(詩文)

 

•청천군 하을지의 칠언절구

송 설부보 환조(送偰符寶還朝)

통일(統一)의 공을 이루어 사해(四海)가 밝았거니,  混一功成四海淸

성사(星使)의 광채가 동영(東瀛)을 비추누나.  使星光彩照東瀛

돌아가는 배에 실은 것 다른 물건 아니라, 歸舟所載非他物

다만 이 삼한(三韓) 상하(上下)의 정(情)이라오.   秪是三韓上下情

 

•목은 이색이 청천군 하을지에게 보낸 시(詩)

계림 윤(雞林尹) 하 장원(河壯元)에게 받들어 부치다.

 

일찍이 청천(菁川) 군문에 재직한 건 알거니와 當日菁川擁碧油

경주 의풍루로 옮겨간 줄은 몰랐소이다.   不知移向倚風樓

병중의 세상일은 지루하기 그지없는데 病中世事悠悠甚

남녘 강산 바라보니 또 가을이 다가오오.  南望江山又欲秋

 

강주 원수(江州元帥) 하 장원(河壯元)이 편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준 데 대하여 받들어 사례하는 시를 대서하면서 붓을 달려 쓰다.

 

기러기가 줄을 지어 또 북으로 날더니 雁影相聯又北飛

두어 줄의 서찰이 사립문에 떨어지네. 數行書札落柴扉

투호하는 곳에 비파를 퉁기지 말게나, 琵琶莫弄投壺處

달 밝은 강주(江州)에 눈물이 옷에 가득하리.  月白江州淚滿衣

가지 위에 꽃 날린 걸 몇 번이나 봤는고?  幾見落花枝上飛

봄바람에 깃발들이 원수를 옹위하누나!    春風旌旆擁黃扉

더디어라, 공이 한 번 용두회 마련하여    遲公一辦龍頭會

백발에 다시 금루의를 들어 보는 것이.    白髮更聞金縷衣

 

•동방(同榜) 아원(亞元) 안길상(安吉祥)이 청천군에게 보낸 시

광주 촌장에서 강화만호 동년장원(同年壯元) 하을지에게 부쳐 드림(廣州村莊寄呈江華萬戶同年壯元河乙沚)

 

삼경(三徑)에 돌아오니 워낙 궁한 내살림, 三徑歸來本自窮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줄 없는 거문고 하나.    無絃琴在月明中

일찍이 보검(寶劍)지녔으나 감춰두니 뭣에 쓰리,   早持寶劒藏何用

질그릇 술병 있어 비잖으면 그만 일세.    只耍窪罇飮不空

제비새끼는 둥지를 떠나 여윈 대(竹)에 앉아 있고, 乳燕辭巢拳痩竹

풀벌레는 철(節)에 놀라 풀포기 속에서 찍찍대네.  草虫驚節咽深叢

즐거운 마음으로 뜰의 나무 보노라니, 怡神久眄庭柯立

우수수 모자에 가득한 바람 시원하구나.   可快凄然滿帽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