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달영(河達盈) : 1763년(英祖 39) ~ 1825년(純祖 25)

 

자는 해경(海卿)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사과공(司果公) 치천(値千)의 후손이고 통정대부 운경(雲景)의 6대손이요 장사랑 윤형(潤逈)의 현손이며, 성기(性冀)의 증손이고 계담(啓淡)의 아들이다.

 

삼가(三嘉) 옥계(玉溪)에서 태어났으나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등에 업혀 중부(仲父)가 계시던 함양 서주(西洲)로 이주(移住)했다. 어머니 명(命)으로 서당(書堂)에 갔는데 총영(聰穎)하였고 열심히 하여 어른들이 대성(大成)하리라 기대했으나 중년(中年)에 병을 얻어 뜻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늦은 나이에 과장(科場)에 갔으나 유사(有司)가 뇌물을 받거나 혹은 대리(代理)로 응시(應試)하는 것을 보고 결연(決然)히 마음을 바꾸어 어머니 봉양에만 전념하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함이 법도(法度)에 지나쳤고 눈비가 와도 조석으로 성묘(省墓)하였다.

 

항상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궁핍(窮乏)하게 되어 베풀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불우(不遇)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마음 맞는 벗과 모여 자연 속에서 거문고 타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여생(餘生)을 보내야 한다 하였다. 이에 노성일(魯聖一), 정동교(鄭東僑)와 함께 수수(洙水) 하류에 대(臺)를 쌓아 무우(舞雩)라 명명(命名)하고 항상 대상(臺上)에서 소요(逍遙)하였다. 또, 노(魯)·정(鄭) 두 분과 동구(洞口) 밖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생을 영입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비오는 밤이라도 반드시 가서 점검(點檢)하였다. 또, 무우대(舞雩臺) 옆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만년(晩年)의 장수(藏修) 장소로 삼으려 하였으나 병으로 이루지 못하고 향년 63세로 졸(卒)하였다.

 

배위는 삼척박씨(三陟朴氏) 상현(尙賢)의 따님과 강양이씨(江陽李氏) 영수(永壽)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다. 필현(必賢), 복현(復賢), 태현(太賢)과 진주인 강석(姜錫)이다. 묘소는 유림면(柳林面) 회동(悔洞) 안산(案山) 반월령(半月嶺) 해좌(亥坐)이고 여암(厲庵) 정도현(鄭道鉉)이 지은 갈명(碣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