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우현(河友賢) : 1768년(영조 44) ~ 1799년(정조 23)

 

공의 초휘(初諱)는 송일(頌逸)이며 자는 강중(康仲)이고 호는 예암(豫菴)이다. 8세 때 소학을 읽고 10세 때 사서(四書)의 뜻을 이해하였으며 이후부터 과거공부에 전념하였는데, 문득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선현들이 했던 일들을 본받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힘을 쏟아야 할 곳을 알았다”하고는 과거공부를 접고 경서 탐독에 전념하였다. 선현들의 공부 방법을 따르면서 치지(致知)를 학문의 요체로 삼아 이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마음속에 경(敬)을 간직하고 정진하였다. 숙부 함와공의 각별한 가르침이 있어 일찍부터 학문이 뛰어나 공문(孔門)의 안자(顔子 : 顔回)에 비견될 만큼 재능이 탁월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 : 經書, 史書, 諸子, 詩文集)에 통달하여 함와공에 못지않게 사회적 역할과 학문적 성취를 기대할 수 있었으나 불행히도 32세로 조서(早逝)하였다. 어려서부터 건강하지 못해 주위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지나친 독서를 만류하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라고 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조 52년 조정에서 재앙이 있어 선비들에게 대책을 구했을 때, 공이 재앙의 7가지 조목을 중심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백성의 구휼, 청렴의 장려 등으로 거의 시폐(時弊)를 적중하는 것이었다.

『추정유잠가중용성명도(追訂柳潛可中庸性命圖)』, 『중용전도(中庸全圖)』, 『미발재중도(未發在中圖)』 등 어려운 경서의 내용들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풀이한 것과 『지경(持敬)』, 『역의의(易疑義)』 등 공의 학문이 성리학의 본령에 깊이 도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후산 허유가 공의 묘에 표하여 이르기를, “천자(天姿)가 아름다워 등이(等夷)에서 훨씬 뛰어났고 여기에 조예(造詣)가 정심(精深)한 것을 더했으며 행의(行誼)가 순무하였다. 효제(孝悌)로 가정에서 흡족해 하였고 충신으로서 주리(州里)에서 믿음을 가졌다. 성역(성리학과 주역)의 의의(意義)를 논한 여러 가지 설명은 스승을 연유하여 이어받은 것이 아니면서도 홀로 경지에 계합(契合 : 부합)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