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재화(河載華) : 1860년(哲宗 11) ~ 1937년

 

자는 복영(復榮), 호는 여인헌(與人軒)이다. 송정공(松亭公) 후손이고 함와공의 계자(季子)인 묵와(黙窩) 계현(啓賢)의 손자요 인재(忍齋) 성운(聖運)의 아들이며 감역(監役) 재곤(載崑)의 아우이다.

공은 1894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천품이 강직하고 효제충신을 생활의 신조로 삼았으며 부귀 현달(顯達)을 구하지 않고 평생 동안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에 정진하였다. 진주지역의 유림행사에 앞장서 참여하여 예(禮)와 법도를 전수하였으며, 1870년(고종 7)에 불탄 덕천서원을 공(公)이 주선하여 1930년 복원하였다. 서원의 옛터에 경의당을 복원하고, 최수우당의 도동서원도 창건하였다. 면우 선생의 선력(宣力)에 힘입어 1904년 진주 선비들이 「주자어류책판(朱子語類冊板)」을 판각(板刻)할 때 장조카 수졸재(諱世鎭)와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책판(冊板)을 사곡리 광명각(光明閣)에 보관하게 하여 금일에 전하니 동방유일의 소장본이다.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전국 유림 137명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탄원서를 보낼 때 강우학맥의 종장 면우 곽종석이 전국의 유림 대표로 추대되자 진주지역의 서명 유림 4인(하재화, 하봉수, 하겸진, 이수안) 중의 한사람으로 참여 하였다. 1926년 제 2차 유림단사건 때에도 거액의 독립자금을 희사하였으며, 1927년 이상재를 회장으로 하여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합작하여 조직한 단일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 영남 유일의 유림대표로 신간회 본부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서울 남산에 건립된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와 진주항일투사추모비 등에 공(公)의 휘함이 새겨져 있다.

 

배위는 광주노씨(光州盧氏) 생원(生員) 이정(以挺)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익진(益鎭), 입진(立鎭), 오진(五鎭), 철진(哲鎭)이고 사위는 함안(咸安) 조용균(趙鏞均)이다. 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 찬(撰) 묘갈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