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재문(河載文) : 1830년(純祖 30) ~ 1894년(高宗 31)

 

공의 자는 희윤(羲允)이고 호는 동료(東寮)이다. 부친(諱慶運)께서 용와공(諱晉賢)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지명당의 현손인 부용담(芙蓉潭, 諱 弼龍)의 계자(系子)로 입적되어 공이 지명당의 6대 종손(宗孫)이 되었다. 8세 때 부친을 잃고 15세 때 조부 부용담(芙蓉潭)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승중상(承重喪)을 치루면서 법도에 한 치의 차질도 없었다. 이후 홀로된 어머니를 40여 년 동안 모시면서 어머니의 명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매사(每事)를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후에 행하였다. 사곡리 구태마을에 살다가 옥종 안계로 이주하였는데 안계마을에는 겸재 하홍도의 학문 도장인 모한재(慕寒齋)가 있어 선비들이 남명 선생과 겸재의 학덕을 추모하며 학문을 닦는 곳이었다. 당시 모한재에는 월촌 하달홍(1809~1877, 양정공후) 선생이 강학을 주도하고 있어 인근의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모한재에서 족조(族祖) 월촌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학문에 정진하였고 『겸재유집』의 간행에도 참여하였다. 1871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상을 마친 후 고향 사곡으로 다시 돌아와 정자에 동료(東寮-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라는 편액을 붙였는데 일찍이 주자가 서료(西寮)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취한 것이다. 일찍부터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면서 남명 선생이 후학을 지도하던 산천재에 가서 강론을 하는 데 주력하였다. 1876년 일본과 수교를 하면서 일본을 거쳐 서양문물이 유입되자 “나라가 이대로 가면 장차 금수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유생으로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월횡에 거주하던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와 함께 진주향교에서 행한 향음주례에 참석해 『대학』 등을 강론했으며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과 교유하면서 산천재에서 『남명집』을 수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집 「동료집(東寮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