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겸진(河謙鎭) : 1870년(高宗 7) ~ 1946년

 

공의 자는 숙형(叔亨)이요 호는 회봉(晦峯)으로, 송정 수일(受一)의 11대손이다. 고조는 함와 이태(以泰)이며, 증조는 정현(正賢)이고 조부는 만취헌 학운(學運)이며 부친은 재익(載翼)이니 모두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13세에 사서오경의 요의를 모두 익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7세에 당대의 명유(名儒) 허유를 만날 수 있었으며, 24세 때부터는 성리학을 논하기 시작하였다. 27세에 쓴 『도문작해(陶文酌海)』의 서(序)를 부탁하기 위해 거창 다전으로 면우 곽종석을 찾아 갔다가 제자가 되었다. 이후 김도화·이만도·이승희·장석영 등 당대 영남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안동·선산·성주지역 선현들의 유허지를 순례하면서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다. 1917년 고향에 구강정사(龜岡精舍)를 지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기 시작하였는데 학생들이 너무 많아 1931년에 덕곡 마을로 이건하여 덕곡서당(德谷書堂)이라 하였다.

1919년 스승 곽면우가 주동이 되어 전국의 유림대표 137인의 이름으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일(巴里長書運動, 제1차 유림단 의거)이 시작되었을 때 공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 후 동문(同門) 심산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 의거’ 때에도 군자금 모금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가 1927년 2월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어 대구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조선 유학사 최초로 우리나라 유현들의 학파연원과 학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동유학안(東儒學案)』 30권을 저술하였으며, 일제하에서 나라와 민족의 얼을 일깨우기 위해 『국성론(國性論)』 『해동명장열전(海東名將列傳)』 『안의사전(安義士傳)』 등을 저술하였다. 공은 면우 선생을 통해 한주 이진상(李震相)의 학설을 이어받았기에 이진상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을 변호하기 위해 ‘심위자모설(心爲字母說)’ 다섯 편을 지어 ‘心’字는 心을 변으로 삼는 성(性)·정(情)·의(意)·려(慮)·지(志) 등을 비롯한 모든 글자의 모체가 된다고 하여 한주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학자로 평가되었다. 주기론자 간재 전우(田愚)의 ‘性師心弟論’〔心은 氣며 百體가 마음(心)을 따르고 마음은 성(性)을 따른다〕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한 2편의 변(辨)을 썼으며, 『주어절요(朱語節要)』 10권, 『도문작해(陶文酌海)』 6권, 『명사강목(明史綱目)』 18권 등의 저술을 남겼다. 만년에는『동시화(東詩話)』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한시사(漢詩史)의 대미를 장식하였는데 정인보 선생이 그 서문에서 “동국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진귀한 시화”라고 극찬하였다.

 

공의 스승 면우 곽종석(郭鍾錫)과 후산 허유(許愈)가 한주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었고, 한주가 정재 유치명(柳致明)을 사사하여 “조운헌도(祖雲憲陶)” 즉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을 헌장(憲章)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으므로 공의 학문 연원은 겉으로 보아 퇴계학맥의 한주학파라고 할 수 있으나 공의 문집에 남명학의 수용이 두드러지게 보여 남명학을 바탕으로 퇴계학을 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서울에 홍보관을 설치하여 유교가 세상에 보익하는 것임을 알리고 가숙(家塾)이나 서당에서 인재를 길러 국맥을 회복하고 민권을 세우자고 주창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국성(國性)이 예의(禮儀)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국성으로써 예성(禮性)을 근본으로 확립하고 그 위에 다른 나라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배위는 진주정씨(晉州鄭氏) 태표(太驃)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영윤(泳允)이고 사위는 밀양(密陽) 박덕종(朴悳鍾), 경주(慶州) 이병각(李秉珏)이다.

 

묘소는 덕곡서당(德谷書堂) 동편(東便)에 간좌(艮坐) 쌍분(雙墳)이고, 문인(門人) 하용환(河龍煥)이 지은 행장(行狀), 재령(載寧) 이일해(李一海)가 지은 묘지(墓誌)와 성환혁(成煥赫)이 지은 갈명(碣銘)이 있고, 회봉문집(晦峯文集) 5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