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우치(河禹治) : 1474년(成宗 5) ~ 1544년(中宗 39)

 

자는 평지(平之)이다. 증조는 성균관직강 순경(淳敬)이고 조(祖)는 통례문 통찬 기룡(起龍)이며 고(考)는 충무위 사과 유(鮪)이다. 무과에 투신하여 군기시 주부에 오른 후 어버이 봉양을 위해 사천 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다. 그 후 내자시 주부를 거쳐 사복시 판관을 지내다 제주점마(濟州點馬)로 나가 차질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호조정랑, 5위도총부 경력 등을 지냈다.

 

여산(전북 익산시 여산면) 군내에 도적들의 폐해가 너무 심해 그곳 수령이 막지 못하자 공이 여산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20여 명의 도적들을 사로잡아 경내를 안정시킨 후 청빈(淸貧)을 일로 삼고 선정을 베풀며 효우(孝友)를 일깨우니 호우(湖右)사람들이 모두 공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내선(內饍)의 일을 맡는 사선서(司膳署) 첨정(僉正)과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을 지낸 후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

 

외직에 근무할 때마다 모두 치성(治聲)이 높아 사천·여산·안주 등에 유애비(遺愛碑 :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내직에서는 공을 일러 전곤(專閫)의 재질이 있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고 하여 종3품 건공장군으로 정3품 훈련원 정(訓練院正)에 보직되는 수직(守職 : 자기 품계보다 높은 관직)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안주목사로 있을 때 얻은 병 때문에 훈련정(訓練正)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귀향하였다.

귀향 후 송강(松江) 가에 관어정(觀魚亭)을 짓고 십수 년 동안 휴양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1이었다. 공은 고향 원로인 청천하씨 사직 하경윤(河敬倫)의 따님과 혼인하여 숙(淑), 활(活) 두 아들과 세 따님을 두었다.

 

장자 숙(淑)은 고성 출신으로 중앙에서 문명을 떨쳤던 대사간 어득강(魚得江)의 따님 함종어씨와 혼인하였으며, 차자 활은 고창현감 박평(朴坪)의 따님 무안박씨와 혼인하였는데 무안박씨는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朴臨卿)의 손녀이며 대사헌, 호조판서 등을 지낸 박호(朴壕)의 조카이다.

세 따님은 함안인 이희철(李希轍), 전의인 이공헌(李公憲), 함안인 이희적(李希績)에게 각각 시집갔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은 묘갈명에서 “무엇을 후세에 남겼는가? 두 아들에게 청빈함을 가르쳤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