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진보(河晉寶) : 1530년(中宗 25) ~ 1585년(宣祖 18)

 

자는 덕재(德哉)요,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손자이고, 승사랑 숙(淑)의 둘째 아들이다.

진양지에, “천성이 낙이(樂易)하고 덕량이 관후하여 일에 임하고 물(物)을 접함에 있어 밖으로 부드럽고 안으로 밝았다”고 기록하였다.

 

명종 10년(155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로 벼슬을 시작하여 승문원 정자(正字) 예문관 봉교(奉敎)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거치면서 시강원(侍講院) 설서(設書)를 겸하였고, 시강원 사서(司書)로 승진하여서도 세자 교육을 잘하여 병조좌랑에 올랐다. 문장이 뛰어나 좌랑으로 부경사행(赴京使行) 3사신(三使臣) 가운데 기록관(記錄官)이면서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는데 중국말을 모두 이해하여 외교문서를 잘 처리할 수 있었다. 그 후 승진하여 정6품으로 정랑(正郞) 정언(正言), 정5품으로 헌납(獻納) 지평(持平) 등을 거치면서 청직(淸職)인 낭관(郎官)과 대간(臺諫)직을 거쳤으며 다시 종4품으로 승진하여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상의원(尙衣院) 예빈시(禮賓寺) 등의 첨정(僉正)을 지낸 후 성균관 사예(司藝)와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좌·우통례(通禮)를 지냈는데 이것이 공이 내직에서 거친 과정이다. 대간(臺諫)으로 근무할 때 차문(箚文)을 올려 생살권(生殺權)을 쥔 당대의 권신 윤원형을 탄핵하였더니 남명 선생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으며, 성균관 사예(司藝)일 때 강원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진휼 상황을 살피는 등 문민질고어사(問民疾苦御史)를 네 번이나 맡았다. 부사 하정(河珽)이 기묘사화 때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여 오랫동안 신원(伸寃)되지 못했는데 공이 이에 신설(伸雪)을 논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명종 22년 외직으로 나가 선산 부사가 되면서 외직으로 부사·목사를 지낸 것이 다섯 번이었는데 선산·안주·성주·김해·밀양이다. 김해 부사일 때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결손관곡 때문에 그 폐단이 적지 않았는데 공이 그 문건을 불태워 버리고 관청비용을 절약하여 보충하고 고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니 공이 떠난 후 공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남명 선생이 후학을 위해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지은 산해정을 확대하여 서원으로 창건하여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셨는데 훗날 광해 원년 신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밀양에서는 주민의 풍습이 귀신을 좋아하여 경내(境內)에 있는 요사한 사당에 사녀(士女)들이 모여들었는데 공이 그 사당의 신상(神像)을 강물에 버렸으며, 또 사가(士家)의 부녀(婦女)들이 송사 때문에 관청에 예사로이 드나들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공이 예양(禮讓)과 염치(廉恥)를 가르치고 깨우쳐 나쁜 습속을 혁파하였다. 얼마 후 강물에 배가 침몰하여 익사자(溺死者)가 발생하자 전례에 따라 체임(遞任)될 처지였으나 사민(士民)이 성문을 막고 한 달이 넘도록 에워싸니 조정에서 이를 듣고 유임(留任)을 허락했으며 백성들은 비를 세워 송덕하면서 이를 인정비(仁政碑)라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는 수우당 최영경과 친교하면서 계자(系子) 성(惺, 죽헌공)을 수우당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공이 병들어 위독하자 수우당이 찾아와 문병하고 친히 탕약을 달였다. 향년 56세로 선조 18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집안에는 관(棺)을 만들 재목조차 없어 수우당 최 선생이 관재(棺材)를 부의(賻儀)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진 분의 부의를 얻었다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공이 떠난 7년 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김해로부터 습격하여 진주를 포위하고 지나는 곳마다 분탕과 살육을 무수히 자행했다. 단지촌에 이르러서는 공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원님의 집이다”하면서 불태우는 것을 금하였으니 이는 대개 왜적을 따라온 자(者) 중에는 김해인(金海人)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다. 200여년 뒤에 김해의 사림들이 신산서원에 공을 배향(配享)할 논의를 했으나 나라의 금법(禁法)으로 인해 이루지 못하였다.

 

배위 숙인(淑人) 전의이씨는 공도(共度)의 따님이고, 후배 숙인(淑人) 진양정씨는 수익(壽益)의 따님인데, 두 분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고 정 씨가 따님 하나를 낳았다. 진평군의 제 7자인 성(惺, 죽헌공)이 공의 제사를 이었으나 족보에는 정인홍의 신원(伸寃) 논의가 시작되던 무렵에 발간된 경자보(更子, 1900년)에서 계자(系子)로 실렸다. 따님은 내암 정인홍의 외아들 정연(鄭沇)과 혼인하였는데 정연은 왜란 중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의병으로 참전하여 22세로 전사하였으며, 정연의 아들 정능(鄭稜)은 인조반정후 유배생활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 후손이 이어져 고종 1년(1864) 후손 정기덕(鄭基德)이 선조(先祖) 정인홍의 신원상소를 처음으로 올렸다.

 

밀양(密陽) 인정비명(仁政碑銘)

 

마음가짐 인자하고 성품은 화락했으며, 일 처리 차분하고 자신지킴 간소했다. 교육 실로 독실했고 정무(政務) 매일 점검했으며, 석채례(釋菜禮) 지극했고 제사 몸소 거행했다. 책상엔 미결 문서 없었고 촌락엔 아전 볼 수 없었으니, 우리 백성 부모였고 진정한 군자였으니, 마음으로 애모(愛慕)함에 어찌 다함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