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맹보(河孟寶) : 1531년(中宗 26) ~ 1593년(宣祖 26)

 

자는 대재(大哉)요, 호는 우계(愚溪)이니 창신교위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유(鮪)의 증손이며 조부는 안주 목사 우치(禹治)이고 아버지는 증공조참의 활(活)이다.

 

공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학문에 집착하였으며 노진의 문하에서 배웠고, 일찍이 예경을 연구하여 한 책을 지어 「상례 초례」라 이름 했다. 송추 아래에 집을 짓고 후진을 열심히 가르치니 향사들이 귀의하였고 임진왜란(1592)에 어가 호종을 명받았으나 병이 들어 나아가지 못하고 독자인 아들과 손자를 보내 어가를 호종케 하니 선조가 가상히 여겨 공을 공신으로 기록할 것을 명했다.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한 남계서원(南溪書院) 원장(院長)을 지냈으며, 1615년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고 병조참판 철성인 이성길(李成吉)이 지은 정려기가 있다. 1701년 구천서원(龜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구천사우에서 매년 양력 5월 5일에 향사를 지낸다. 배위는 화순최씨(和順崔氏) 부사직(副司直) 정제(貞濟)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묵재(靜默齋) 제(悌)이고 사위는 반남인(潘南人) 박위(朴葳)다.

 

정려기(旌閭記)

 

선생은 진주의 드러난 성씨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성현의 글에 잠심(潛心)하였고, 집안에서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했다. 부친께서 병이 나자 약을 달이며 대변을 맛보았다. 울면서 하늘에 빌어서 병이 이내 나았다.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예에 지나쳤으며, 이미 장사를 하고는 여묘 3년에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벗지 않았고 조석으로 곡함을 풍우에도 건너뛰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일찍이 제육이 떨어짐을 근심하자 노루가 스스로 찾아와 이를 잡아 제수로 썼으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 하였다.

 

부모상에 전후 6년 동안 시종 미음을 먹고 한결같이 슬퍼했으니 형제와 뭇 종형제들이 모두 본보기로 삼았다. 상을 마치고는 아침저녁으로 사당에 배알하고 출입에 반드시 아뢰면서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으니 비록 옛날의 지효라 해도 이에 더할 것이 없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으나 선생은 곧 조용히 가묘에 들어가 신주를 모시고 제기를 감추었으니 모두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하늘이 연수를 더하지 않아 63세에 세상을 떠나니 원근의 사대부들이 애통하고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여러 의론이 모아지자 누차 실적을 갖춰 본 군에 알리고 방백에게 전달하여 조정에 장계를 올려 정려를 청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오래도록 표창이 없었다. 금상 즉위 8년에 향의가 여전하고 군의 보고가 예전 같아 방백이 예부에 보고하니 이에 윤허하여 드디어 정려가 섰다. 만력 43년(1615년) 7월 일 정려함.

군수(郡守) 철성인(鐵城人) 이성길(李成吉)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