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각(河   恪) : 1555년(明宗 10) ~ 1596년(宣祖 29)

 

자는 자익(子益)으로 진사공파(進士公派) 파조(派祖)이다.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증손이고 진평군 위보(魏寶)의 아들이다. 1555년(明宗 10) 진주 단목에서 위보(魏寶)의 11남 중 3남으로 태어나, 선조 12년(己卯)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방명(榜名)이 진주 연계재에 빛나건만 불의의 세란(世亂)으로 과거를 유보하고 장수(藏修)하였다.

 

묘갈명(墓碣銘)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산93의 1번지의 신좌원(辛坐原) 오척봉(五尺封)은 고(故) 선조조(宣祖朝)의 진사 하공(河公) 휘 각(恪), 자(字) 자익(子益)과 배위 동래정씨(東萊鄭氏)의 합분(合墳) 묘소이다.

 

금춘에 공의 12세손인 병건(炳乾) 병조(炳朝) 형제가 서실로 나를 찾아와 이르기를 심산 중에 위치한 사백년 선산(先山)을 수호하기가 극난(極難)하므로 부득이 북상면 가곡촌 후산 간좌원(艮坐原)에서 자손들의 거주지였던 이 땅으로 천장(遷葬)하여 수치(修治)하려 하니 집사(執事)는 묘명(墓銘)을 찬하라 하므로 문득 원필(援筆) 쓰기를, 공은 진양인으로, 고려 충절신 증문하시랑동평장사(忠節臣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 공진(拱辰)이 시조이시고, 누전(累傳)하여 휘 거원(巨源)은 공민왕조의 증병조판서 행중정대부 전객령(贈兵曹判書行中正大夫典客令)으로 공의 9대조(九代祖)이시며, 삼전(三傳)하여 휘 순경(淳敬)은 좌익원종공신 행성균직강(佐翼原從功臣行成均直講)이니 공의 6대조(六代祖)이시다. 증조 휘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요, 조(祖)의 휘는 숙(淑)이시며 승사랑(承仕郞)이고, 고(考)의 휘는 위보(魏寶)니 진평군 증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晉平君贈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이고, 외조부는 참의(參議)로 사천이씨(泗川李氏) 휘 륜(綸)이고, 또 한분의 외조부는 진양강씨(晉陽姜氏) 참의(參議) 휘 우(佑)이다. 공은 명종 10년 을묘(乙卯, 1555년) 진주 단목에서 11남 중 삼자(三子)로 태어나니 유년부터 영오(穎悟)하여 효제(孝悌)에 진성(盡誠)하고 성품 또한 온후(溫厚)하여 자성(資性)이 발중(拔衆)하며, 지항(志向)이 겸개(慊慨)하여 시세를 우념(憂念)하니 부조(父祖)의 기망(期望) 또한 비범(非凡)하였다. 선조 12년 기묘(己卯)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방명(芳名)이 진주 연계안(蓮桂案)에 소연(昭然)했건만 불의(不意)의 세란(世亂)으로 과거를 유보하고 초야에 장수(藏修)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오로지 식덕(植德)에 여념(餘念)이 없더니, 마침 임진왜란이 발(發)하자 안의북상(安義北上)으로 피난하여 주야로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일질(一疾)을 얻어 요졸(夭卒)하니 선조(宣祖) 29년 병신(丙申, 1596년)이다.

 

이에 사린(四隣)이 함께 제읍(制泣)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의방교육(義方敎育)에 진성(盡誠)하였으니 그 이모(貽謨)하고 적덕(積德)한 학문의 명성은 백세토록 불절(不絶)할 것이다. 남(男) 시운(始運)은 자 형보(兄甫)니, 축대(築坮)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망배(望拜)하였다. 친족(親族)을 이산(離散)하고 어쩔 수 없는 비극(悲劇)의 현실이라 역사 속에 묻어두고 속으며 살아온 한 많은 세월이 아니던가? 손(孫)은 문백(文伯)이며 증손(曾孫)에 태윤(泰潤)이며 현손(玄孫)은 응천(應千)이다. 여(餘)는 불록(不錄)하고 명(銘)을 읊어 이르기를,

고향(故鄕) 떠나 피란길 어언 사백십(四百十), 갈망(渴望)하던 고향산천 그 심사(心思) 뉘 알리요? 출세(出世)마저 멈추고 산중(山中)에서 생을 마치니 나라일 근심하여 몇 번이나 체읍(涕泣)했소.

 

광복(光復) 재병술(再丙戌, 2006년) 계춘절(季春節)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