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증(河   憕) : 1563년(明宗 18) ~ 1624년(仁祖 2)

 

자는 자평(子平)이요, 호는 창주(滄洲)이니, 창주공파(滄洲公派) 파조(派祖)이다.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증손이고 생부는 진평군 위보(魏寶)이며 양부는 생원공 국보(國寶)이다. 159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1601년에 덕천서원 중건(重建)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을 중건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1606년에 덕천서원 원장이 되어 덕천서원 원생록을 수정 보완해 남명의 학맥을 정리하는 데 힘썼고, 1612년에 남명의 학기유편을 간행하였으며, 1617년에 남명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621년에 하씨 족보 「천계보(天啓譜)」를 창보(刱譜)하고 1622년 여름에 덕천서원에서 하겸재와 이정전서(二程全書)를 교수(校讎)했으며 덕천서원 중건기(重建記)를 지었고 진주향교 중건에도 참여하였다. 남명(南冥) 선생과 한강 정구(寒岡鄭逑) 및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등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박민(朴敏), 성여신(成汝信), 한몽삼(韓夢參), 조겸(趙㻩), 하홍도(河弘度), 조임도(趙任道) 등과 가까이 지냈다. 1622년에 진주 청곡사에서 진양지 창간을 주간하였으며, 2년 후 1624년에 고령으로 졸하였다. 사후 임천서원에 배향되고 「창주 선생 문집」이 있다.

 

사적비명(事蹟碑銘)

 

무릇 현인군자(賢人君子)로 태어나, 살아서는 도덕을 베풀어 생민(生民)을 교화(敎化)하고 죽어서는 서원에서 향식(享食)하여 방명(芳名)을 천추에 선양(宣揚)하나니, 선조조(宣祖朝) 진사 창주(滄洲) 하 선생(河先生)은 진주가 낳은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아니겠는가! 광복 계미년 경향(京鄕)의 선생 후손이 주사(州士)와 상의(相議)하기를 세쇠도미(世衰道微)한 오늘날 패륜(悖倫)과 사설(邪說)이 난무(亂舞)하는 계세(季世)에 즈음하여 선생의 지업과 덕학을 풍비(豊碑)에 새겨 윤상(倫常)을 들추는 한편, 후대로 하여금 길이 법(法) 삼게 함이 시급한 일이라 논정하고 후손 상욱(尙郁), 오봉(五鳳), 병선(炳先)이 나를 찾아와 그 문(文)을 청(請)하므로 문득 사양(辭讓)하지 못하고 삼가 쓰기를,

선생의 휘(諱)는 증(憕)이요 자(字)는 자평(子平)이며 진양인(晋陽人)이다. 고려 좌사랑중(左司郞中)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이고, 이로부터 벼슬과 문필(文筆)이 면면(綿綿)히 이어와 증조(曾祖) 휘(諱)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이고, 조(祖)의 휘(諱)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니, 어관포 선생 득강(魚灌圃先生得江)의 여(女)를 취(娶)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晋平君) 휘(諱) 위보(魏寶)와 문과(文科) 사간(司諫) 휘(諱) 진보(晋寶) 및 성균생원(成均生員) 휘(諱) 국보(國寶)를 두었고, 고(考) 진평군(晋平君)은 사천이씨(泗川李氏) 참의(參議) 륜(綸)의 여(女)와 진주강씨 우(佑)의 여를 취(娶)하여 9남(九男)을 두니 선생은 제 5자(第五子)로 명종 18년 계해에 내당(內塘)에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영재가 풍발하여 8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달하였고 9세 때 생비(生妣) 이부인(李夫人) 상(喪)을 당하여서는 애훼(哀毁)하고 집례(執禮)함이 성인을 지나쳐 주위가 경탄하였으며 계부(季父)가 무육(無育)하여 선생이 입후하니 모부인 강 씨는 성재 선생(誠齋先生) 휘(諱) 응태(應台)의 손(孫)이요 사직(司直) 휘(諱) 열(洌)의 여(女)로 임란에 항적 순절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선생은 기질이 인후하고 지기(持己)에 독실(篤實)하여 접인(接人)에 화기가 넘쳤으며 천성이 효우하여 부모를 섬김에 정성(定省)의 절(節)과 지체(志體)의 양(養)을 다하였고 관혼상제(冠婚喪祭)는 반드시 가례를 준수하였으며 제질(弟姪)을 곤궁(困窮)에서 구하여 공락(共樂)함은 물론 기아(飢餓)에서 신음하는 빈자에겐 창고를 열어 시혜(施惠)하였다. 질(姪) 지상(智尙)이 10세 때 적(賊)에게 생포되니 심력을 쏟아 구출하였으며, 제(弟) 변(忭)이 정유 난에 체포되자 선생은 20년에 항(恒)한 혈성(血誠)으로 계제(季弟) 협(悏)과 부산을 삼왕래(三往來)하면서 마침내 생환하게 하니 어찌 일가의 경사에 그쳤겠는가. 그 애인하고 호의(好義)함이 이와 같았다.

 

선조 24년 신묘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로는 미증유(未曾有)한 대란(大亂)을 겪느라 과거마저 단념하고 개연히 구도(求道)에 주심(注心)하여 선현의 심법체험(心法體驗)에 여념이 없었으니, 평거(平居)에 화려(華麗)한 의복을 입지 않았고 부허(浮虛)한 말을 구외(口外)에 불출(不出)하였으며 집신(執身)이 매우 엄하여 언제나 소학내편(小學內篇)을 실천하였고, 임하(林下)의 정궤(靜几)에서 고서를 남김없이 완미(玩味)하되 긴요한 점은 반드시 질의하고 강론하여 부지(不知)를 방과(放過)함이 없었으며 일찍이 후도(後徒)에게 이르기를 성현의 교훈을 심중에 새겨 숙습(熟習)하면 자연히 이치를 깨닫는다고 논(論)하였다. 평생에 남명 선생 문하에서 친자(親炙)하지 못함을 한(恨)하더니 전란에 퇴락한 덕천서원 중건에 원장 이모촌(李茅村) 정(瀞)과 함께 진력하여 선조 39년 병오에 낙성하고 중건기를 저작(著作)하였으며, 이어 선생이 원장을 맡아서는 남명학기를 한천록(寒泉錄)에 의하여 분류 간행하였고 또 관포집(灌圃集)이 전화(戰禍)에 탕실(蕩失)된 것을 초고(草稿)를 수집하여 판각하였고, 명륜(明倫)은 선계를 밝히는 데 있음을 역설하고 창보(創譜)하되 잘못된 세계를 변정(辨正)하였으며, 다시 진양지를 편저하여 지방사를 밝히니 그 존사(尊師)하고 계후(啓後)한 공(功)과 저술하여 위도(衛道)한 업은 백세토록 수광(垂光)할 것이 자명(自明)하다.

 

선생은 일찍이 한강 정 선생을 신당(新塘)에서 뵙고 수일을 머물면서 남다른 장려(獎勵)를 입고 의리를 발굴한 후로는 자주 간찰로써 학문을 논하고 덕천서원사를 자문하였다. 만년엔 성부사 여신(成浮査汝信), 한조은 몽삼(韓釣隱夢參)과 의교하여 강월(江月)에 음시(吟詩)하고 춘사(春社)에서 강의하며 노년을 느긋하게 즐기더니 홀연히 인조 2년 갑자 10월에 향년 62세로 서거(逝去)하여 오곡리(烏谷里) 갑자원(甲子原)에 장(葬)하니 우금(于今) 380년이다. 배 진주강씨는 현령(縣令) 로(潞)의 여로 선생과 동년에 생·졸하였고 묘는 합폄(合窆)이며 무자(無子)하여 제 현감 휘(諱) 성(惺)의 자(子) 휘(諱) 달도(達道)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오호라 선생 같은 석덕으로 일찍이 득위(得位)하여 대현(大顯)하지 못함을 지금토록 개탄하는 이 많으나, 그러나 선생은 원래부터 선현을 본받아 수도하고 행도(行道)하며 전도를 사명삼아 사문(斯文)에 진공(秦功)함이 지대하다. 그러므로 숙종 28년에는 주사(州士)들이 임천서원을 창설하여 선생을 포함(包含)한 오현(五賢)을 봉향하니, 이는 고어(古語)에 이른바 향선생몰(鄕先生沒)에 서원을 설치하여 시축(尸祝)하고 창도(倡道)함을 표준삼은 것이다. 후록(後祿) 또한 창성(昌盛)하여 세인이 흠선(欽羨)하니 이는 왕양(汪洋)한 선생 유택(流澤)의 소치(所致)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명사(銘詞) 읊어 이르기를,

 

아아! 선생 도학(道學) 외외(巍巍)하여 영우(嶺右)의 샛별, 이구(尼丘) 심법(心法) 유심(擩深)코자 그 지조(志操) 독실(篤實)했네. 영특함이 탁월하여 경서(經書) 백가(百家) 섭렵(涉獵)했고 송창(松窓)에서 도등(挑燈)하며 성리학 추구(追究), 생포된 제질(弟姪) 생명 혈성(血誠) 쏟아 구출했고 가난에서 신고(呻苦)하는 빈민(貧民)에 시혈(施血)했네. 환로(宦路)가 무슨 소용 초개같이 버리고 산자수명(山紫水明) 정한 곳에 많은 후도 가르쳤네. 선생 고풍비(先生高風碑)에 새겨 영모재(永慕齋)에 높이 거니 저 강파(江波) 더불어 천년토록 황황(皇皇)하리.

 

단기(檀紀) 4336년(서기 2003년) 계미(癸未) 하지절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