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경(河   憬)  1566년(明宗 21) ~ 1593년(宣祖 26)

 

자는 경부(敬夫)요 호는 춘당(春堂)이니, 참봉공파(參奉公派) 파조(派祖)이다.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증손이고 증 순충보조공신 이조판서 진평군 위보(魏寶)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제형(諸兄)을 따라 강학하였고, 자라서는 내암 정인홍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제자가 되었다. 추천으로 사재감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을 탐구하고 정진하여 진리를 터득하였다.

 

묘비명(墓碑銘)

 

우리 하씨는 진양(晉陽)에서 나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까지 나오면서 크게 현달(顯達)하였으니, 그런 사실들은 역사 속에 여러 차례 나타났었다. 중세 선조(宣祖) 이후에 이르러 가문이 점점 한미(寒微)해지면서 관직도 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학문의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학문의 문채가 아름답고 또 손꼽을 만한 것이 많았으니, 유림간(儒林間)에서도 칭송함이 있었다.

 

부군(府君)의 휘는 경(憬)이신데 선조 때 분이시다. 벼슬은 장사랑 사재감참봉(將仕郞司宰監參奉)이시고, 증조부의 휘는 우치(禹治)이신데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내셨고, 조부님의 휘는 숙(淑)이신데 승사랑(承仕郞)이시고, 고(考)의 휘는 위보(魏寶)이신데, 생원으로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晉平君)에 추증되셨다. 외조부는 참의(參議) 사천 이공(李公) 휘 륜(綸)이시고, 또 한분의 외조부는 진양강씨(晉陽姜氏)로 참의(參議) 휘 우(佑)이시다. 배위는 함안이씨(咸安李氏) 대사헌 인형(仁亨)의 현손이시고, 부군(府君)의 아드님은 한 분 뿐이셨는데, 휘는 지상(智尙)이며 벼슬은 장사랑(將仕郞)이다. 우리 선세(先世) 보첩(譜牒)을 살펴보건대 부군(府君)의 사적(事蹟)이 기재(記載)되어 있으나 겨우 세계(世系)와 관직(官職)뿐이다. 또 벼슬을 받으신 해가 어느 해인지 탄생(誕生)하신 해와 돌아가신 연월일 등도 다 미상(未詳)이니 고증(考證)해 볼 길이 없다. 그 밖에 행실이며 문학 문장까지도 또한 일반으로 세상에 모두 전해져 나타난 바 없었다.

 

부군(府君) 형제 중 아홉 형제분은 다 유망(儒望)이 있었으나 산림 속에 자취를 감추고 벼슬길에 나아감을 즐겨하시지 않으셨다. 가만히 이로써 부군(府君)께서 사셨던 그 당시 세상사를 미루어 생각하고 헤아려 본다면, 이때는 남명 선생(南冥先生)의 학문이 영남지방에 크게 행해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인의(仁義)를 중하게 여길 줄 알고 작록(爵祿)을 진흙덩이와 같이 가볍게 여겼다. 또 부군(府君)의 맏형이신 송강공(松岡公) 휘 항(恒), 다섯째 형이신 창주공(滄洲公) 휘 증(憕), 일곱째 계씨(季氏)인 죽헌공(竹軒公) 휘 성(惺), 아홉째 계씨(季氏)인 단지공(丹池公) 휘 협(悏)등 다섯 분 형제께서는 남명 선생(南冥先生)을 사숙(私淑)하였고, 학문을 연마(鍊磨)함에 있어 서로 사우(師友)가 되시기도 하셨다.

 

부군(府君)께서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가정의 착한 일에 젖어들어 어진 행동에 감화(感化)되었고 그 가운데서 비록 배우지 않으려고 하여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성취(成就)한 학문과 재주는 의당 그 뜻을 펼쳐서 이 나라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 줄 수 있었는데, 마침 임진·정유년의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흩어지고 부숴 졌으며, 계속하여 어리석은 임금이 윤상(倫常)을 타락시키고 북인(北人)들이 권세를 휘둘러, 군자들이 은미(隱微)한 것도 알고 드러난 것도 알아서 자득(自得)하여 욕심이 없는 것을 높이 숭상했는데, 또한 이 당시 시의(時義)가 역시 그러하였다. 아! 슬프다. 부군께서도 그와 같은 불행한 시기를 맞았으니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부군의 묘는 덕곡 선영(德谷先塋)이 계시는 서쪽 능선 남향에 배위 이 씨(李氏) 할머니와 합폄(合窆)으로 모셨다. 후손 기식(璣植)이 겸진(謙鎭)에게 부군(府君)의 같은 후예(後裔)라 하여 묘비문(墓碑文)을 위촉(委囑)해 왔으므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전해 들은바 그대로 적어 상세하지 못하니, 대체로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그대로 전한다는 한 방도에 따랐을 뿐이다. 다시 고증할 만한 문헌이 나타나면 곧 이것을 씻어내고 다시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후인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1대손(十一代孫) 겸진(謙鎭)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