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성(河   惺)  1571년(宣祖 4) ~ 1640년(仁祖 18)

 

자는 자경(子敬)이요, 호는 죽헌(竹軒)이니, 죽헌공파(竹軒公派) 파조(派祖)이다.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 위보(魏寶)가 생부이고 중부 진보(晉寶)가 후사가 없어 입계하였다.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으로 곽재우를 찾아가서 군무를 도와 공을 세웠고, 1603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효행으로 추천되어 효경전 참봉에 제수되고 이어 사옹원직장과 내자시주부, 장수현감 등을 지냈다. 문집 「죽헌집(竹軒集)」이 있다.

 

사적비명(事蹟碑銘)

 

진양을 본관으로 하여 진주에 세거해온 하씨(河氏)는 국중(國中) 명벌(名閥)이 되었다. 고려 충절신(忠節臣) 증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다. 이 문중에서는 대대로 명공석덕(名公碩德)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단목(丹牧)에 사는 일파(一派)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로 많은 선비들이 나와 강우(江右)의 유림(儒林)을 주도하여 왔다. 그 가운데서 효우(孝友)·충의(忠義)·사관(仕官)·지절(志節)·학문을 두루 갖춘 인물로는 죽헌 선생(竹軒先生)을 추앙한다.

 

선생의 휘(諱)는 성(惺)이요, 자(字)는 자경(子敬)이요, 죽헌(竹軒)은 그 호(號)이다. 고조는 창신교위(彰信校尉) 휘(諱) 유(鮪)이고, 증조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휘(諱) 우치(禹治)이며, 왕고(王考)는 승사랑(承仕郞) 휘(諱) 숙(淑)이고, 황고(皇考)는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낸 휘(諱) 진보(晉寶)인데 남명 선생(南冥先生)의 제자이다. 비위(妣位)는 숙인 전의이씨(全義李氏) 공도(公度)의 따님과 숙인 진양정씨(晉陽鄭氏) 선전관(宣傳官) 수익(壽益)의 따님이다. 생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진평군(晉平君) 휘 위보(魏寶)이고, 생모는 사천이씨(泗川李氏) 참의(參議) 륜(綸)의 따님이다. 선조 신미(1571)년 음력 1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비범하였고 신중하고 근면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우하여 진평군(晉平君)이 특별히 애정을 기울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실질적인 일에 힘썼다. 자라서 수우당 최영경(守愚堂崔永慶) 공을 따라서 배웠는데, 이치(理致)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도의를 연마하고 지절(志節)에 힘써 그 당시 여러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입었다.

 

1591년 진평군(晉平君)의 상(喪)을 당했는데 난리 중에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렀다. 탈상 후 망우당 곽재우 장군(忘憂堂郭再祐將軍)의 진영(陣營)에 가서 작전을 도운 것이 많았는데, 화왕동고록(火旺同苦錄)에 그 사실이 다 수록되어 있다.

 

정유 1597년에 아우 단주공(丹洲公) 변(忭)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공은 형 창주공(滄洲公)과 아우 단지공(丹池公)과 함께 19년 동안 부산항(釜山港)을 왕래하며 정황을 알아보아 환송을 위하여 노력하여 마침내 아우가 생환(生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효우가 감동시킨 바라 하여 시(詩)로 읊어 칭탄(稱歎)하였다. 창주공(滄洲公)이 후사(後嗣)가 없어 자기 아들 달도(達道)를 양자(養子)로 세워 가계(家系)를 잇게 하였다. 계묘(1603)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추천으로 효경전(孝敬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부임했다. 그 때는 임진왜란을 막 겪은 뒤라 고을이 매우 피폐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웠는데, 자혜롭게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아전들을 단속하여 공정하고 청렴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번거로운 일을 제거하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고을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그 덕을 칭송하였다.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어 국왕이 그 치적(治績)을 가상히 여겨 흰 말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 당시 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을 전주로 옮겨 봉안(奉安)하려 했는데, 그 곳에서 과거(科擧)를 거행하여 그 일을 경축하고자 하였다. 당시 전라도(全羅道)에서 고을 원으로 있는 사람 가운데 과거출신(科擧出身) 아닌 사람은 응시할 수 있었다. 그 때 실권자(實權者)가 선생이 덕망이 있기에 발탁할 의도를 갖고서 합격시키려고 작정하고 있었으나, 선생은 끝내 응시하지 않고, 그 해 가을에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였다.

 

동계(桐溪) 정온 선생(鄭蘊先生)과 도의지교를 굳게 맺었는데,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幽閉)하자 동계(桐溪)와 함께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강직하게 간(諫)하니, 그 당시 세상에서 아침 햇살에 봉황새가 우는 격이라고 일컬었다. 임술(1622)년에 이르러 대북세력(大北勢力)이 더욱 치성(熾盛)하여 조정이 날로 문란해지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아우 단지공(丹池公)과 함께 탄핵하는 소(疏)를 올리고 대궐 문앞에 삼일 동안 엎드려 있었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아 남쪽으로 돌아왔다. 정묘(1627)년 후금(後金)이 침공해 왔을 때 고을 사람들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선생을 장수(將帥)로 삼았다. 의병을 이끌고 상주에 이르렀을 때 화의의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형제들과 더욱 우애를 돈독히 했고, 의리에 서로 힘썼고, 재산에는 구분이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후한 순씨(後漢荀氏) 집안의 팔용(八龍)에 견주었다. 자제(子弟)들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언행(言行)을 보고서 선생 집안의 자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조카 달영(達永)이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기에 집에서 거두어 길러 성취시켰는데, 마치 친자식처럼 했다. 늘 모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다. 자신의 회갑 날이 곧 모친 기일(忌日)이라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더욱더 이기지 못하여 글을 지어 고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만년에 성리학(性理學)을 더욱 정밀하게 공부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에 주석(注釋)을 붙여 후학들을 지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시(詩)를 읊조리면서 강호(江湖)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면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노파 이흘(蘆坡李屹), 부사 성여신(浮査成汝信), 한사 강대수(寒沙姜大遂), 죽각 이광우(竹閣李光友), 겸재 하홍도(謙齋河弘度), 태계 하진(台溪河溍), 조은 한몽삼(釣隱韓夢參) 같은 분들이 서로 학덕을 강마하는 사우들이었다.

 

경진(1640)년 7월 27일에 서세(逝世)하니 향년 70세였다. 여러 사우들이 통석(痛惜)함을 이기지 못했다. 진주 고을 북쪽 명석면 계원리 산 116번지 태좌(兌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진영(眞影)이 남아 있어 단목에 따로 경죽당(景竹堂)이라는 집을 지어 봉안하여 지금까지 매년 채례(菜禮)를 거행하고 있다. 배위(配位)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 참봉 사겸(思謙)의 따님이다. 혈육이 없다. 묘소는 합천군 청덕면 가현리 건좌(乾坐)의 언덕에 있다. 계배(繼配)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재록(再祿)의 따님이고, 감사(監司) 월(越)의 손녀로 곧 망우당(忘愚堂)의 질녀(姪女)였는데 부덕이 있었다. 묘소는 공의 묘(墓)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달원(達遠), 달유(達悠), 달도(達道), 진사(進士) 달장(達長)이다. 따님은 양륜(梁崙)에게 시집갔다. 달원(達遠)은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보(潽)와 원(沅)이고 따님은 첨지(僉知) 송정필(宋廷弼)에게 시집갔다. 달유(達悠)는 일남을 두었으니 청(淸)이다. 달도(達道)는 창주공(滄洲公)의 양자(養子)가 되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생원(生員) 명(洺)과 홍(泓)이고, 따님은 참봉 정기헌(鄭岐憲)에게 시집갔다. 달장(達長)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교랑(宣敎郞) 속(涑)이고, 따님은 김설(金薛), 이영진(李榮震), 윤선(尹璿), 이세무(李世茂)이다.

 

아아! 선생은 근도(近道)한 자질을 타고나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남명 선생(南冥先生)의 고을에서 생장하여 남명의 제자인 부친과 수우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 남명의 경의지학(敬義之學)과 출처대절(出處大節)을 계승하였으니, 그 학문과 경륜(經綸)을 짐작할 만하다. 가정에서는 효우를 다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강직하게 간언을 하는 기풍(氣風)이 있었다. 국난에 임해서는 적개(敵愾)하는 용기가 있고, 난정(亂政)을 보고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조용히 학문에 전념한 지절이 있었다. 당시 사우들의 만제(挽祭)를 보면 선생의 학덕을 충분히 추상할 수 있다. 문집 죽헌집(竹軒集)이 간행되어 있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다. 시문은 간절(懇切)하고 측달(測怛)하여 세상을 걱정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내용이 많다.

 

아아! 선생이 사세(辭世)한 지 사백 성상(星霜)이 가까워 온다. 참다운 선비로서의 그 훌륭한 자취가 사람들의 생각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 이에 선생의 자취를 천추에 영원히 불후(不朽)하도록 하자고 하여 후손 현 함안군수 성식(盛植)이 창도(倡導)하고 거자(巨資)를 먼저 출연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각자 성의(誠意)를 표시하여 유림(儒林)들의 도움을 얻어 이 비역(碑役)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 준비되자 14세 주손(冑孫) 병권(炳權)과 후손 재명(在明)이 죽헌집(竹軒集) 및 관계된 문집(文集)을 갖추어 불초(不肖)를 찾아와 청문(請文)하였다. 불초(不肖)가 평소(平素)에 선생을 존모(尊慕)하여 그 문적(文籍)을 열독(閱讀)한 바 있었으므로 크게 사양하지 않고 문집과 관계문적(關係文籍)을 상고하여 선생의 생평(生平)과 사적을 서술하고 뒤에 명(銘)을 붙인다.

 

진양산수 정기 받은, 진양하씨 성벌(盛閥)이라. 평장공(平章公)의 뒤를 이어, 명공석덕(名公碩德) 뇌락부절(磊落不絶). 조선왕조(朝鮮王朝) 선조조(宣祖朝)에, 구형제(九兄弟)가 찬연(燦然)했네. 걸특(傑特)하신 죽헌 선생(竹軒先生), 유림중(儒林中)에 교초(翹楚)였네, 천자(天資) 이미 정영(精英)한데, 근성(勤誠)으로 치학(治學)했네. 수우당(守愚堂)과 부친(父親) 통해, 남명(南冥) 학문(學問) 접맥(接脈)했네. 천부적인 그 효우에, 진충(盡忠)하여 창의구국(倡義救國). 난정(亂政)에는 바른 상소 참된 선비 전형(典型)이라. 경륜(經綸) 펼칠 때 아니라, 강호(江湖)에서 침명(沈冥)했네. 경서강독(經書講讀) 후학양성(後學養成), 다음 세대(世代) 기약했네. 훌륭하신 그 자취가 광음(光陰)흘러 점차 인멸(湮滅). 후손들이 간성(懇誠) 쏟아, 불후(不朽)하길 도모하네. 아름다운 행적(行蹟) 모아, 궁비(穹碑) 세워 새겼다오. 천추만세(千秋萬世) 흘러가도, 죽헌 선생(竹軒先生) 증명하리.

경인(庚寅) 2010년 엽월(葉月) 초순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김해 허권수(許捲洙)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