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변(河   忭)  1581년(宣祖 14) ~ ?

 

자는 자하(子賀)요, 호는 단주(丹洲)이니 단주공파(丹洲公派) 파조(派祖)이다. 안주목사 우치(禹治)의 증손이며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의 아들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20년 만에 사신 오윤경이 일본과 협의하여 환국하니, 당시 공의 나이 37세였다. 저서로 목저록(牧羝錄), 노중경력(虜中經歷)이 있고, 「단주실기(丹洲實記)」가 전해지고, 곽종석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사적비명(事蹟碑銘)

 

아아! 선조 30년(1597년)에 우리는 왜(倭)의 침략을 거듭 당하고 전통기강(傳統紀綱)을 다시 무너뜨리니 역사는 이를 정유재란이라 칭한다. 위치상으로 영우지방(嶺右地方)이 가장 화를 많이 받게 되었으니, 지(智)와 용(勇)을 다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인 당시의 형세를 어찌 명기할 수 있겠는가! 진주의 절의사 단주 선생(節義士丹洲先生)은 당년 17세로 침입한 적에게 체포(逮捕)되어 동후(洞后)의 숲속에서 피란중인 가족과 이별할 때의 그 참상(慘狀)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용하겠는가! 한번 적에게 끌려간 공은 즉시 일본으로 압송(壓送)되어 갖은 곤욕(困辱)을 겪었으나 여하(如何)한 협박(脅迫)과 유혹(誘惑)에도 의(義)를 지켜 불굴하니 적 또한 최후의 엄벌을 결행(決行)하려다가 공의 위인(爲人)을 살펴보니, 용모(容貌)가 탁출(卓出)하고, 재지(才智)가 영특(英特)하며, 문사(文詞) 또한 발중(拔衆)하므로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그 대접(待接)을 후(厚)하게 하였건만, 공은 적의 유인(誘引)을 감지(感知)하고 부동(不動)하자, 적은 도끼와 칼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불변(不變)하니, 적 또한 별안간에 굴하지 않음을 예측하고, 이때부터 관대(款待)하여, 문득 해도(海島)에 체류(滯留)케 한 3년만에, 관대히 철귀(撤歸)시키고 다시 구속하여 대판(大阪)에 이르러, 관백(關伯)의 관(館)에 거(居)하게 한 후 의식주를 고관(高官)과 같이 예우(禮遇)하였다. 수월(數月)을 지나 하루는 관백(關伯)이 추장(酋長)에게 명하여 설연(設宴)하게 하고, 은근히 이르기를, 전일 귀국에 있을 때는 항절(抗節)을 상정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산 같은 파도가 만 겹으로 솟구치니, 날개를 가진들, 비공(飛空)할 수 있겠는가. 사생 또한 막중한 일, 내말을 들으면 부귀가 면전에 다가온다.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정색(正色)하고 이르기를, “의(義)가 아니면 천만금도 소용없다. 부모가 낳아준, 이 몸을 버리고, 원수(怨讐)의 나라에 벼슬함은 가장 불의한 일이니, 오직 일사(一死)가 있을 뿐이다. 다시는 물언(勿言)하라”하니, 관백(關伯)이 대로(大怒)하여, 극동(極東) 절도(絶島)의 깊숙한 곳에 가시 울을 막고 혹독(酷毒)한 곤란(困難)을 다 주었으나, 공은 태연히 버티었다. 그 무렵 도인(島人) 자녀(子女)들이 내관(來觀)하자, 공은 언문(諺文)을 일어(日語)로 번역하여 시서(詩書)를 가르쳤다. 도인(島人)이 교화(敎化)입어, 도추(島酋)에게 부탁하여 가시 울을 철거하고 후대하기를 희망하며 이르기를, 공은 아직 총각(總角)의 신분이니, 중매(仲媒)나서 달라고 하자, 방청(傍聽)하던 공이 강하게 거절(拒絶)하였다. 그런데 천만의외(千萬意外)에도, 재로(在虜)한 지 이십 일년 되는 삼십칠 세시 관백(關伯)은 공이 끝내 불굴(不屈)함을 보고 가신(家臣)에게 극형을 명하였다. 아아! 바로 이때 본국 사신(使臣)이 도일(渡日)하자, 고대하던 창주(滄洲), 죽헌(竹軒), 단지(丹池) 삼형제(三兄弟)가 정성을 다하여 구제(救濟)를 애원(哀願)한 끝에 드디어 사신(使臣) 따라 귀환(歸還)키로 결정되니, 어찌 하늘의 고념(顧念) 없이 가능하겠는가! 부산에 하선(下船)할 때, 창주형(滄洲兄) 단지제(丹池弟) 일행이 유대(留待)하여, 지하에서 소생(蘇生)한 동기를 만난 듯 기뻐하였고, 고향에는 하겸재 홍도(河謙齋弘度), 성부사 여신(成浮査汝信), 조봉강 겸(趙鳳岡㻩), 강한사 대수(姜寒沙大遂), 권광주 선(權光州璿) 제현(諸賢)이 공을 한(漢)의 중랑장 소무(中郞將蘇武)의 절의에 비하여 손색없다 하고 의기가 양양(揚揚)하였다. 소무(蘇武)는 무제시(武帝時)에 흉노(匃奴)로 사신 갔다가, 구인(拘引) 당(當)하여 십구 년간 갖은 협박 끝에 불굴(不屈)하고 돌아온 의사(義士)이다. 공 또한 노중에서 형제에게 기서(寄書)하기를, 우리 시조 시랑공부군(侍郞公府君)께서 세상에 남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조국을 위하여 거란적을 토벌한 절의(節義)입니다. 만약 탈출에 실패하면 선조의 혼(魂)을 천하(泉下)에서 배알하면 족합니다고 하였다. 아아! 전통 절의가 아니면 어찌 이같이 표현했겠는가. 옛 선현 말씀에, 소득보고 행(行)함은 이(利)이고 소득 없이 행함은 의(義)라 하였으니, 소중랑(蘇中郞)은 천자(天子) 위한 절의이고, 단주공(丹洲公)은 군자 지킨 절의(節義)이다. 저술(著述)한 서책(書冊)은 단주집(丹洲集) 1권, 목저록(牧羝錄) 1권, 연기(年記), 노중경력급국사구귀전말(虜中經歷及國使救歸顚末)이 있었으나, 중년에 소실되었으니 안타깝다. 공의 휘(諱)는 변(忭)이요, 자(字)는 자하(子賀)며, 호(號)는 단주(丹洲)이고 진양인이다. 시조의 휘(諱) 공진(拱辰)은 고려 현종사신(高麗顯宗使臣)으로 거란에 억류(抑留)되었으나 시종 불굴(不屈)로 적지에서 몰(沒)하여,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증(贈)하였고, 6대조 휘(諱) 순경(淳敬)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며, 5대조 휘(諱) 기룡(起龍)은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이요, 고조(高祖) 휘(諱) 유(鮪)는 창신교위(彰信校尉)며, 증조(曾祖) 휘(諱) 우치(禹治)는 통훈대부 안주 목사(通訓大夫安州牧使)이고, 조(祖) 휘(諱)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며 고(考) 휘(諱) 위보(魏寶)는 증이조판서 진평군(贈吏曹判書晉平君)이니, 일평생(一平生) 임천(林泉)에 거(居)하면서, 남명(南冥)의 학풍(學風)을 듣고, 후학교육(後學敎育)을 임무 삼았으며, 비(妣) 정부인(貞夫人) 사천이씨(泗川李氏)는 참의(參議) 륜(綸)의 여(女)로 칠남(七男)을 두었고, 정부인(貞夫人) 진양강씨(晉陽姜氏)는 참의(參議) 우(佑)의 여(女)로 사남(四男)을 두었는데, 공(公)은 그 장(長)으로 선조(宣祖) 14년(1581) 신사생(辛巳生)이다. 십일형제 중 성취(成就)한 이는 육인이니, 세상에서 칭하는바 단동하씨 육현(六賢)이다. 공(公)이 십일 세시에 고상(考喪)을 당하여서는 애모통곡(哀慕痛哭)은 물론이요, 집전주선(執典周旋)에도 소홀(疏忽)함이 없었다.

 

광복 15년 기해(己亥, 1959년)에는 자손들이 당후(堂後)의 녹죽(綠竹)을 군자에 비하고, 정하(庭下)의 열천(冽泉)을 덕행으로 상징(象徵)삼아 단동 하촌(下村)에 사간 와옥(四間瓦屋)을 창건하고 재계소(齋戒所)로 삼으니, 바로 죽천재(竹泉齋)이다. 공(公)은 느긋한 상유(桑楡)를 임천에서 마친 뒤 졸하여 미천(美川)의 오방리 논수동 산 유좌원(梧坊里論水洞山酉坐原)에 장(葬)하고, 배(配) 성산이씨(星山李氏) 충의위(忠義衛) 유눌(惟訥)의 여(女)를 좌부(左祔)하였다. 생 1남 2녀 하니 남(男)은 생원 달제(達濟)요, 여(女)는 인천이씨(仁川李氏) 옥견(玉堅)과 이태영(李泰榮)의 처(妻)며, 생원(生員)이 생 1남(生一男)하니 정(瀞)이요, 정(瀞)이 생 1남 2녀(生一男二女)하니 남(男)은 윤채(潤采)요, 여서(女壻)는 조신규(趙信圭), 노기(盧虁)며 여(餘)는 불록(不錄)한다. 광복(光復) 신묘(辛卯, 2011) 춘정(春正)에, 후손(後孫) 계명(啓明), 인식(仁植)과 종후손(從後孫) 오봉(五鳳), 병선(炳先) 제우(諸友)가 진주의 봉산서실(鳳山書室)로 나를 찾아와 단주 선생(丹洲先生) 사적비문(事蹟碑文)을 청(請)하므로 문득 사양(辭讓)할 수 없어, 삼가 졸필(拙筆)을 무릅쓰고 위와 같이 찬(撰)한다.

단기(檀紀) 4344년 신묘(辛卯) 중절(仲節)

삭녕(朔寧) 최인찬(崔寅巑)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