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협(河   悏)  1583년(宣祖 16) ~ 1625년(仁祖 3)

 

자는 자기(子幾)요, 호는 단지(丹池)이니, 단지공파(丹池公派) 파조(派祖)이다. 증조는 통훈대부 안주목사 휘 우치(禹治)이며,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 휘 위보(魏寶)이다. 1606년에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지조(志操)가 담박(淡泊)하고 청개(淸介)하여 항상 법도대로 행하고 성인(聖人)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으며,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높이 추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성부사(成浮査) 여신(汝信), 한조은(韓釣隱) 몽삼(夢參), 허창주(許滄洲) 돈(燉), 하겸재(河謙齋) 홍도(弘度) 제공과 도의교를 맺었다. 문집 「단지집(丹池集)」이 있다.

 

사적비명(事蹟碑銘)

 

나무는 뿌리가 깊고 튼튼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茂盛)하듯이, 한 가문도 현조(顯祖)를 근원으로 삼아 화목해야만 번성(繁盛)할 수 있다. 진주 단목리에 세거하는 단지(丹池) 하공(河公)의 후손들은 공을 정신적 근원으로 삼아 화목하게 살아오고 있으니, 장래(將來)의 번성(繁盛)을 예측할 수 있다. 단목의 진양하씨는 시례(詩禮)를 세전(世傳)하고 효우를 돈수(敦守)해 온 통국(通國)의 성벌(盛閥)로서 역사상 많은 명공홍유(名公鴻儒)가 뇌락상망(磊落相望)하였다.

 

단지공(丹池公)의 휘(諱)는 협(悏), 자(字)는 자기(子幾), 단지(丹池)는 후인들이 올린 존호(尊號)이다. 그 시조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의 충절신(忠節臣) 휘(諱) 공진(拱辰)인데, 거란(契丹)에 억류(抑留)되었으나 항굴(降屈)하지 않고 순국(殉國)하였다.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후손 휘(諱)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인데 공(公)의 증조(曾祖)이다. 왕고(王考) 휘(諱)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고 황고(皇考) 휘(諱) 위보(魏寶)는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贈純忠輔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로 진평군(晉平君)에 봉해졌다. 황비(皇妣)는 사천이씨(泗川李氏)로 참의(參議) 륜(綸)의 따님과 진양강씨(晉州姜氏) 이조참의(吏曹參議) 우(佑)의 따님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16(1583)년 계미(癸未)에 강씨부인(姜氏夫人)이 공(公)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품자(稟資)가 영오(英悟)하고 재기(才氣)가 절륜(絶倫)하였다. 유시(幼時)에 부모(父母)를 잃었으나 능히 스스로 호학불권(好學不倦)하였다. 겨우 십세(十歲)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으나 난리 중(亂離中)에도 덕행(德行)을 닦고 학문(學問)에 힘썼다. 효우(孝友)가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왔으니, 모부인(母夫人)이 난중(亂中)에 작고(作故)하여 장례(葬禮)를 조촐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늘 죄괴감(罪愧感)을 갖고서 의식(衣食)을 검박(儉薄)하게 하여 비용(費用)을 마련하여 이장(移葬)하여 유감(遺憾)이 없도록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바로 위 형(兄) 단주(丹洲, 忭)가 왜(倭)에 납치(拉致)되어 갔는데, 공(公)은 주야(晝夜)로 견권(繾綣)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일본(日本)가는 사행(使行)이 있게 되면, 공(公)은 매번(每番) 부산(釜山)으로 가서 지성(至誠)으로 읍청(泣請)하며 서신(書信)을 부쳐 보냈다. 마침내 연락(聯絡)이 닿아 21년(年)만인 정사년(丁巳年)에 귀국(歸國)하게 되었다. 다섯째 형(兄) 창주(滄洲) 증(憕)을 엄부(嚴父)처럼 존경(尊敬)하며 따랐고, 창주(滄洲)도 각별(恪別)히 사랑하여 지교(指敎)하였다. 지조(志操)가 정결(貞潔)하고 식견(識見)이 명민(明敏)하였고, 언행(言行)을 법도(法度)에 맞게 하였고, 의리(義理)를 숭상(崇尙)하였는데, 당시 유림(儒林)에서 명성(名聲)이 높았다. 23세(歲) 때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으나 북인(北人)들의 천전(擅專)을 보고는 과환(科宦)을 단념(斷念)하고 일체(一切)의 권리(勢利)를 잊고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면서 자락(自樂)하였다. 그러나 잠시(暫時)도 국가(國家)와 민생(民生)을 잊고 혼자만 결신장왕(潔身長往)하려 한 적은 없었다. 대북정권(大北政權)의 패륜적(悖倫的) 정사(政事)에 대해서 일곱째 형(兄) 죽헌(竹軒) 성(惺)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항론(抗論)하니 사림에서 칭탄(稱歎)하였다. 공(公) 같은 간세지재(間世之材)가 치세(治世)를 만났더라면 묘당(廟堂)에서 경륜(經綸)을 펼쳐 국가(國家) 민족(民族)에 공택(功澤)을 끼칠 만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고 생(生)을 마쳤으니,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탄석(歎惜)을 금(禁)치 못하게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以後)에는 사진(仕進)할 수 있었으나 지절(志節)을 지키다가 인조(仁祖) 3년(1625) 을축(乙丑) 10월(月)에 서세(逝世)했는데 춘추(春秋) 겨우 43세(歲)인지라 사우(士友)들이 모두 통석(痛惜)해 마지않았다. 진주(晉州) 지수면(智水面) 용봉리(龍鳳里) 동지(東旨)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는 진주정씨(晉州鄭氏)로 생원(生員) 승훈(承勳)의 따님이고,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구이당(具邇堂) 달영(達永), 달천(達天), 진사(進士) 달한(達漢)이고, 따님은 조징성(趙徵聖), 윤재(尹載), 윤대(尹戴)에게 출가(出嫁) 하였다. 손자(孫子)는 현(灦), 주(澍), 호군(護軍) 형(浻), 설(渫)이다. 현(灦)의 사남(嗣男)은 형(浻)의 아들 윤관(潤寬)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이후(以後)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하여 이루다 수재(收載)하기 어럽다.

 

아아! 공(公)은 남명 선생(南冥先生)의 경의(敬義)의 학맥(學脈)을 계승(繼承)하여 의리(義理)에 밝고 실천(實踐)에 민첩(敏捷)하였다. 공(公)의 형제(兄弟)와 자손(子孫)들은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장(院長) 혹(或)은 원임(院任)으로서 수백 년간(數百年間) 강우(江右)의 유론(儒論)을 주도(主導)하였기에, 세교(世敎)에 끼친 영향(影響)이 지대(至大)하였다. 공(公)은 원래(原來) 많은 시문(詩文)을 저작(著作)했으나, 대부분 일실(逸失)되어 오늘날 전존(傳存) 하는 것은 영성(零星)하지만, 그 청신유량(淸新瀏亮)하고 돈좌기굴(頓挫奇崛)한 조예(造詣)는 용속(庸俗)한 부류(部類)들이 감(敢)히 기급(企及)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서법(書法)에도 능(能)하였는데 아건(雅健)한 경지(境地)는 탈속(脫俗)의 기운(氣韻)이 있었다.

 

공(公)의 후손(後孫)들은 하씨(河氏) 여러 문중(門中) 가운데서도 가장 번성(繁盛)한데, 오늘날에도 정계(政界) 재계(財界) 교육계(敎育界) 등 각(各) 방면(方面)에서 활약(活躍)하는 인재(人材)들이 제제(濟濟)하다. 정치학(政治學) 박사(博士)로 사선(四選)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지낸 순봉(舜鳳)은 13대(代) 종손(宗孫)인데 가문(家門)의 근간(根幹)으로서 융창(隆昌)을 주도(主導)하고 있다. 공(公)이 당일(當日) 종덕(種德)한 결실(結實)이 면면(綿綿)히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석(前昔)에는 후손(後孫)들이 동족촌(同族村) 단목(丹牧)에서 숭조목족(崇祖睦族)하며 살아왔으나, 산업화시대(産業化時代)가 도래(到來)함으로 인하여 생업(生業)을 쫓아 각지(各地)로 산거(散居)하게 되어 유서(由緖) 깊은 유가(儒家)의 풍운(風韻)이 점차(漸次) 인멸(湮滅)되게 되었다. 세월(歲月)이 더 흘러가면 일족(一族)이 환취(歡聚)하기가 쉽지 않아 가까운 친족(親族)도 남처럼 될까 우려(憂慮) 하던 차(次)에, 공(公)의 잉복(賸馥)이 서려 있는 지내(池內) 광풍대(光風臺) 제월정(霽月亭) 아래 숭비(崇碑)를 건립(建立)하여 그 사적(事蹟)을 각재(刻載)하자는 논의(論議)를 계선(啓先)이 수창(首唱)하자, 제손(諸孫)들이 적극(積極) 호응(呼應)하였다. 이에 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를 구성(構成)하여 일에 착수(着手)하니, 각지(各地)의 후손(後孫)들이 다투어 헌성(獻誠)해 와 거역(巨役)이 순조(順調)롭게 진행(進行)될 수 있었다. 이 비석(碑石)은 공(公)의 사적(事蹟)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將次) 객거(客居)하는 자손(子孫)들의 정신적(精神的) 고향(故鄕)이 되어 단지문중(丹池門中)의 구심점(求心點) 역할(役割)을 하게 될 것이다. 비재(碑材)가 갖추어지자 위원장(委員長) 계동장(啓東丈) 등(等)이 관계(關係) 문적(文籍)을 갖추어 불녕(不佞)에게 청문(請文)하였다. 불녕(不佞)이 평소(平素)에 공(公)의 학행(學行)에 관심(關心)을 두고 있었고, 또 그 후손(後孫)들의 존조(尊祖)의 효침(孝忱)에 감동(感動)하여 서술여우(敍述如右)하고 끝에 명(銘)을 붙인다.

송백(松柏)같은 그 기절(氣節)에, 금옥(金玉)같은 그 행신(行身)은 선비정신(精神) 귀감(龜鑑)으로, 군학 중(群鷄中)에 일학(一鶴)이라. 구세(救世) 위(爲)한 장지(壯志) 품고, 큰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했네. 정국(政局) 혼미(昏迷) 어이하랴? 외모(外慕) 끊고 내행(內行) 닦아 양성종덕(養性種德) 그 결과(結果)로 자자손손(子子孫孫) 번창(繁昌)하니, 이 모두가 공(公)의 이모(貽謨). 의당(宜當)할사 음수사원(飮水思源), 후손(後孫) 효침(孝忱) 결집(結集)하여 사적(事蹟)새겨 궁비(穹碑) 건립(建立). 퇴폐(頹廢)해진 이 세상(世上)에, 인륜회복(人倫恢復) 도움 되리.

병술(丙戌, 2006)년 상원일(上元日)에

문학박사 국립경상대학교교수 김해(金海) 허권수(許捲洙)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