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인상(河仁尙)  1571(宣祖 4) ~ 1635년(仁祖 13)

 

자(字)는 임보(任甫)이고 호는 모송재(慕松齋)이다.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장손이요 송강공 항(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재능과 인품이 뛰어났고 어버이의 효행을 이어 효우(孝友)로 칭송되었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하여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문중의 장손으로 가학(家學)을 착실히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광해 5년(1613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일 때 북인들이 국모(國母)를 폐위시키려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공이 앞장서 발언할 것을 원했다. 공이 분질러 이르기를 “남의 신하된 자들이 강상(綱常)의 죄를 범하려 하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이 되겠는가?”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할 뿐 권귀(權貴)의 집에는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훗날 문생(門生)인 태계 하진(河溍)이 “이는 곧 동옹(桐翁-동계 정온)이 했던 일과 같은 셈이다”라고 하였다. 광해 9년 공의 숙부 창주공이 주축이 되어 남명 선생의 ‘문묘종사 疏’를 올릴 때 공이 영남의 선비 수백 명을 창도(唱導)하였으며 소두(疏頭)로 추대 되었다.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종사랑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일찍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당을 짓고 동계(東溪) 권도(權濤), 동산(東山) 권극량(權克亮) 등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을 교수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시에 이름이 드높았고 태계 하진(河溍) 등 많은 문하생들이 공의 문(門)에서 나왔다.

 

배위 의인(宜人) 진주강씨는 현령 로(潞)의 따님이며, 후배(後配) 의인 전의이씨는 중추부사 응기(應麒)의 따님인데,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해 종제(從弟) 지상(智尙)의 차남 계문(啓文)을 사자(嗣子)로 삼았는데 계문이 2남 3녀를 두었다. 부실(副室) 성산이씨는 함안 선비 황곡(篁谷) 이칭(李偁)의 서녀로 서자 셋을 얻었는데 유문(有文) 출문(出文) 득문(得文)이다. 서자들은 손자 이후로 보첩에 오르지 못해 후손을 잇지 못했다. 은열공 정신열과 퇴헌공 정천익을 모시는 대평면 마동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선고(先考) 송강공(松岡公)과 함께 배향되었다. 『교재록(喬梓錄)』이 있어 세상에 행해졌으며, 문집 『모송재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