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달한(河達漢)  1624년(仁祖 2) ~ 1677년(肅宗 3)

 

자(字)는 통원(通源)이고 호는 용강(龍岡)이다. 증(贈)순충익조공신 이조판서 진평군(晉平君) 위보(魏寶)의 손자이고 단지공(丹池公) 진사(進士) 협(悏)의 셋째 아드님이다. 1660년(顯宗 1) 사마시(進士)에 입격하였으나 당시 사림(士林)이 분열되고 당쟁(黨爭)이 격렬(激烈)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거업(擧業)을 접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자연 속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겸재 하홍도의 문하에서 남명학의 핵심을 전수받았다. 정인홍의 몰락 후 남명(南冥)문집의 편차(編次)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진주권역의 남명학파가 분열되어 갈등을 겪게 되었을 때 최백련의 무고로 단목가(丹牧家)가 대북잔당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공이 종질(從姪) 하명(河洺)과 함께 회덕의 우·춘(尤庵 宋時烈과 同春堂 宋浚吉) 양현(兩賢)을 찾았더니 양현께서 그 무망함을 알고 구명(救命)에 힘써 마침내 귀정(歸正)케 되었다. 이후 향리에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짓고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아 경학에 잠심(潛心)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니 양현이 선학(仙鶴)으로 지목하였다. 용강(龍岡)이라 자호(自號)한 것은 남양(南陽)땅 와룡강(臥龍岡) 아래에 은거(隱居)하면서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하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흠모(欽慕)해서였다.

 

공의 배위는 참봉 송치원(宋致遠)의 따님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통덕랑 곽창후(郭昌後)의 따님 현풍곽씨(玄風郭氏)인데 곽씨부인은 망우당(忘憂堂)의 종손녀이다. 송치원은 합천 대병의 선비로 호가 송헌(松軒)이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우·춘(尤春)의 문인이다. 출후손(出后孫) 계휘(啓輝) 찬 묘지(墓誌)와 족후예(族後裔) 겸진(謙鎭) 찬 갈명(碣銘), 그리고 문집 『용강유집(龍岡遺集)』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