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 륜(河 崙) : 1347년(忠穆王 3) ~ 1416년(太宗 16)

 

 

진강군(晉康君) 식(湜)의 증손이요 문정공(文貞公) 시원(恃源)의 손자이며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윤린(允潾)의 아들이다. 정종조(定宗朝)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 태종조(太宗朝) 좌명(佐命) 공신 1등에 녹훈(錄勳)되고 태종조에 영의정을 4차례나 지냈으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문충공파(文忠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묘갈명(墓碣銘)

 

하씨의 선조는 진양에서 나서 한 고을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諱) 공진(拱辰)이 고려에 벼슬하였는데, 현종(顯宗) 때에 오랑캐와 강화하여 적병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 뒤에 휘 탁회(卓回)께서 고종(高宗) 때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 이후 4대(代)가 과거에 합격하여 세상에 명성이 드러났으며, 경사가 겹치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공의 휘는 륜(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의 휘는 식(湜)이니, 박사의 5세손(五世孫)으로 벼슬이 징사랑(徵仕郞) 선관서승(膳官署丞)이었는데,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純忠補祚功臣輔國崇錄大夫判司評府事晉康君)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시원(恃源)이니 식목녹사(式目錄事)로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에 증직되었으며, 고(考) 휘(諱)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부사(奉翊大夫順興府事)였는데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에 증직되었고, 비(妣) 강 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으로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사 판호조사(崇錄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에 증직된 휘 승유(承裕)의 따님이다.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써 증직을 받은 것이다.

 

1347년 지정(至正) 丁亥(고려 충목왕 3년) 봄에 강 씨가 길한 꿈을 꾸고 태기가 있더니 그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우뚝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10세에 입학하여 배우면 곧 외웠고, 14세인 1360년(庚子年)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는데,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그 시관(試官)이었다.(「고려사」에는 도촌(桃村) 이교(李嶠)로 되어 있다.) 19세인 1365년(恭愍王 14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이문충공(李文忠公) 초은(樵隱) 인복(仁復)과 이문정공(李文靖公) 목은(牧隱) 색(穡)이 그 좌주(座主)였다. 문충공이 한번 보고는 곧 큰 그릇으로 여겨서 그 아우 예의판서 인미(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그 당시 두 분이 유학(儒學)의 종주(宗主)가 되어서 학사와 대부가 다 그 문하에서 나왔다. 공이 사우(師友)들과 기거(起居)하며 강론하고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1367년(恭愍王 16년)에 춘추관에 뽑혀 검열(檢閱)을 거쳐 공봉(供奉)이 되었고, 1368년에 감찰규정에 임명되었다. 1369년에 검수사(檢收司)의 토지 측량하는 것을 감독하다가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부사(副司)가 된 자를 탄핵하여서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가, 1371년에 신돈이 주살된 후에 불려가 지영주사(知榮州事)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공의 치행(治行)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1372년(恭愍王 21년)에 불려 올라가 고공좌랑(考工佐郞)이 되었고, 1373년(恭愍王 22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의 찰방(察訪)이 되었으며, 1374년에 제능서 영(諸陵署令)에 제수되었고, 1375년(禑王元年)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전리사 정랑(典理司正郞)을 거쳐서 1376년에는 전교부령 지제교(典校副令知制敎)에 승진되었고, 전의 부령(典儀副令)에 옮겼다가 1377년에 전법총랑 보문각직제학(典法摠郞寶文閣直提學)으로 옮겨 전과 같이 지제교를 맡았으니, 이로부터 다른 직책(職責)을 맡아도 항상 관직(館職 : 예문관, 춘추관, 집현전에서 수찬, 편집, 교정 등을 맡았던 벼슬)을 겸임하였다. 또 그 해에 판도 총랑으로 교주도 안렴사가 되었고, 1378년에는 전리총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379년에는 전교령 성균관 대사성(典校令成均館大司成)에 승진되었다. 1380년(禑王 6년) 9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기용되었으나, 상(喪)을 마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1382년에 상이 끝나서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제수되었고, 1383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옮겼다가, 곧 전리판서가 되었으며, 1384년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제학(提學)이 되었고, 1385년에 첨서사사(簽書司事)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명나라 태조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왔는데, 공이 서북면에서 영접하였고, 그가 돌아갈 때에 공이 사은(謝恩)의 표문(表文)을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예를 다하여 존경하였다. 1387년에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오르고, 1388년 봄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치려하므로 공이 힘껏 불가함을 말하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내쫓았는데, 여름에 최영이 실패함으로써 공이 돌아오게 되었고, 1389년 봄에 다시 동지사사가 되었다.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라는 자가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공이 인척관계로 전부터 왕환의 얼굴을 알았으므로 그가 왕환이 아니라고 말하다가 광주로 유배되었다. 1390년 봄에 옮겨서 울주(蔚州)로 유배되고, 여름에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 여러 귀양 갔던 사람을 청주로 모아 대질하였는데, 이때 공은 방면되어 진주로 돌아갔다. 1391년 여름에 불려서 전라도 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임신년(1392년) 여름에 교대해서 돌아왔다.

 

우리 태조께서 천명을 받으신 후 1393년(太祖 2년) 가을에 다시 공을 불러서 경기좌도의 관찰사로 기용하니, 공이 처음으로 민호(民戶)가 개간한 땅이 많고 적은 것으로 부역을 정하였다. 부유한 자는 비록 싫어하였지만 고을 사람들은 그 공평함에 감복하였으므로 여러 도(道)가 다 본받아 드디어 법으로 정해졌다. 그때에 태조께서 수도를 계룡산으로 옮기려고 이미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공이 중지할 것을 힘써 간하니 따랐다. 1394년 3월에 다시 첨서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중추원사로 옮겼다. 7월에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다음해 4월에 예문춘추관 학사에 기용하니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명나라 고황제가 표문(表文)의 말이 근신(謹愼)하지 못하다 하여 글을 맡았던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고, 또 우우(牛牛) 등 관원을 보내서 독촉하였는데 공이 관반사(館伴使)를 맡았었다. 태조께서 은밀히 조정 신하들에게 정도전을 보내야 할지 여부를 물으시니 다 관망하면서 반드시 보낼 것 없다 하는데, 공은 홀로 말하기를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정도전이 크게 앙심을 품었다. 7월에 태조께서 이지(李至)를 보내서 아뢰려고 하였더니 명(明) 사신이 말하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 만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 청하니 함께 가게 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게 아뢰고 사리를 분명하게 하였더니 과연 해결되었다. 1397년(太祖 6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사를 동원하여 국경 밖까지 출병하려고 의논할 때 공을 꺼려서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다. 그해 봄에 왜(倭)의 추장 두어 사람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4월에 공이 관찰사와 절제사 등 여러 사람과 처리할 바를 의논하는데, 의논된 방책을 주관한 자가 실수하여 왜의 추장이 도망해 갔으므로, 6월에 공(公) 등을 체포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심문하여 7월에 수원부(水原府)에 안치했다가 10월에 석방하였다. 1398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9월에 상왕(定宗)이 왕위를 계승하심에 공을 불러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였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는데 공을 뽑아서 제일로 정하고 진산군(晉山君)의 작위를 내렸다. 명나라에 들어가 건문황제(建文皇帝)가 등극한 것을 하례하였고, 1399년 12월에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400년 4월 찬성사에 승진되고, 5월에는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원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院事)가 되었다.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 임명되고, 작위를 올려서 진산백(晉山伯)이 되었다. 11월에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셨고, 1401년(태종 1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을 책정하는데 공이 또 1등이 되었다. 윤 3월에 병으로 인하여 사퇴하였으나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하고, 4월에 지공거(知貢擧)를 맡아서 지금 지신사(知申事)로 있는 조말생(趙末生) 등 33인을 뽑았다. 7월에 관제를 고쳤는데, 그로 인해서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서, 처음으로 국내에서 통용할 수 있는 저화(楮貨 : 지폐)를 제조할 것을 청하여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1402년 6월에 근천정(覲天廷), 수명명(受明命) 등 악장 두 편을 지어 올리니, 왕이 교서를 내려서 격려하고 표창하였다. 10월에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에 임명되었고, 명나라에 가서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등극을 하례하였는데 지의정부사 이첨(李詹)이 부사(副使)로 함께 갔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서 이첨과 함께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새 천자가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작명(爵命)도 고쳐 주시기를 청합니다.”하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겼다. 1403년(太宗 3년) 4월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같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왔으므로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시어 상으로 주신 것이 매우 후하였다. 1404년 6월에 가뭄으로 자원하여 사임하였고, 이듬해 정월에 복직되어 좌정승에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다. 1406년에 공이 각 종파의 사사(寺社) 주지가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고 재물을 모아 여색(女色)을 탐하며 재물을 노략질하고 민중을 미혹하게 한다 하여 건의해 아뢰기를, 각 도 주군(州郡)에 요량하여 한 두 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혁파하여 그 토지와 노비는 모두 다 공용에 속하게 하라고 하니 임금이 허락해 따랐고, 식자(識者)들이 잘했다고 일컬었다. 1407년 4월에 문사들 중시(重試)에 공을 독권(讀券)으로 삼으니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7월에 또 가뭄으로 직위에서 파하기를 청하였고, 1408년 2월에 영의정부사가 되었으며, 1411년 3월에 지공거를 맡아서 지금 평양판관인 권극중(權克中) 등 33인을 뽑았고, 1412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었으니, 공은 이에 이르러서 네 번째 나라의 정사를 맡은 것이다. 1414년 4월에 나라에서 옛날 주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의 서무를 나누어서 6조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로 삼았다. 1415년 10월에 또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416년(太宗 16년) 봄에 공의 나이 70인지라 고사(故事)를 들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자꾸 고하니 임금이 특별히 공을 우대하여 조회하지 말라 하시다가 4월에 이르러서야 허락하시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저(私邸)에 나아갔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시었다. 그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에 사신을 보내어 선대의 능침을 순시하려 하니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연로함을 민망히 여기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서 친히 교외에 납시어 전별(餞別)하였다.

 

공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는데 병이 나니, 임금이 듣고서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를 시켜서 음식을 조리하게 하며, 관원을 시켜 문병하고 위로하는 것이 길에 이어졌더니, 11월 초 6일 계사에 정평 관아에서 돌아가셨다. 관아에서 보낸 부음이 도달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시어 눈물을 흘리시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소찬으로 7일을 지내시었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하시고, 또 호상유사(護喪有司)를 임명하여 서울로 돌아와 서울 집에 빈소를 차리게 하였으며,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상(弔喪)하고, 전(奠)을 들였으며,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려 주시고, 관에서 장사(葬事) 돌보는 것을 보통보다 더하게 하였으니. 공이 돌아가신 뒤의 영예는 유감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이듬해 1417년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總制公)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가 진주 오방동(梧坊洞) 북쪽 산언덕 선영(先塋)의 동쪽에 장사 하였으니 생전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공은 천성이 중후하며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온화하고 과묵하였다. 평생에 급한 말과 황망한 빛이 없었고, 조복(朝服)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의심나는 것을 결단하고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그 기상이 의젓하였으며, 욕하거나 칭찬한다고 해서 조금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에 힘쓰고 세세하게 살피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좋은 계획과 비밀한 의논으로 임금을 보좌한 것이 크고 많지만, 물러 나와서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았고, 남과 교제함에 한결같은 정성으로 거짓이 없었으며, 일가친척에게는 인자하고 붕우(朋友)에게는 미더웠으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다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인재를 천거함에 항상 모자람이 있어도 조금만 잘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뽑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서의 일상은 재산을 불리려 하지 않았고,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며, 잔치하고 노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성품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한가롭게 시를 읊조리어 자고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통달하였으며, 음양(陰陽), 의술(醫術), 천문(天文), 지리(地理)에까지 다 매우 정밀하였고, 예악과 제도도 다 상세하게 정하였다. 후생들을 권면하여서 의리를 확립하는 데 되풀이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국정을 담당하면서부터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중국에 보내는 문서나 문사들의 저술은 반드시 공이 윤색하고 인정해야 결정되었고,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 태조실록 15권을 편수하여 올렸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고 문집 20권이 있다. 미리 유언하는 글을 지어서 문서함 속에 간직하였는데 자손을 훈계한 것이 섬세하게 구비되어 있고, 또 경계하기를 상사(喪事)와 장사(葬事)는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부인 이 씨는 진한국대부인에 봉작되었는데, 한 아들을 낳았으니 구(久)이며, 중군도총제(中軍都總制)요, 딸이 두 사람인데, 맏이는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상좌도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事)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한 사람인데 복생(福生)으로 어리다. 외손이 5명인데 모두다 절제사의 아들이다. 공전(恭全)은 전 공정고부사(前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고, 성전(誠全), 순전(順全), 항전(恒全)이다.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장(長)과 연(延)은 어리고, 영(永)은 의흥시위사 대호군(義興侍衛司大護軍)이요, 서녀(庶女)도 세 사람인데, 맏이는 곡산부사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그 다음은 어리다.

 

명(銘)하여 이르노라. 진산(晉山)은 푸릇푸릇, 진수(晉水)는 출렁출렁. 아름답다, 지령(地靈)이여! 우리 호정(浩亭) 나게 하셨구나. 선생의 타고나신 천품, 옥같이 윤택하고도 깔끔하도다. 쇄락한 가슴 속에는 밝은 달 시원한 바람이라. 저 하늘이 우리 동방 사랑하여 우리 임금 돕게 했네. 말하면 듣고 계획하면 따르시니 천년에 한 번 만날 지기(知己)로구나. 내세워서 정승 삼으니 백관의 어른이라. 공(公)이 묘당에 있으니 환과(鰥寡)에도 은택일세. 이단은 배격하고 도학은 제창하니 공은 지금 당나라의 창려(昌黎 : 한유韓愈)같고, 양대 임금 옹립하여 해와 같이 모셨으니 공은 지금 송나라의 치규(稚圭)일세. 기미 먼저 밝게 알고 계획하여 빠짐없으니 그 누가 같을쏜가, 장막 안의 자방(子房)이요, 충의로운 정성이 백일을 꿰뚫었으니 그 누가 같겠는가, 시종(始終)으로 분양(汾陽 : 당나라 충신인 곽자의郭子儀)일세. 업적도 광대하고 덕망도 높으시니 마땅히 나라의 원로일세. 70에서 끝났으니 누구라서 수(壽)했다 할까? 고굉지신(股肱之臣) 쓰러지니 임금께서 슬퍼하시고, 현철한 이 돌아가니 행로인(行路人)도 눈물짓는다. 슬프구나, 선생께서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종정(鍾鼎)에 이름 남기고 고향으로 혼령 갔네. 울총(鬱葱)한 저 선산에 길이길이 장례하니, 돌 깎고 말 새겨서 오래오래 보이리라.

가선대부 예문관제학 집현전제학 동지경연 춘추관사 윤회 찬

 

진산 부원군 하륜의 졸기

 

•태종실록 32권 - 태종 16년 11월 6일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정평(定平)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이르니, 임금히 심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하고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백 권을 치부(致賻)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 정인지(鄭麟趾)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원로(元老) 대신은 인군(人君)의 고굉(股肱)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典禮)이다. 생각하면 경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山嶽)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 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이 되었고, 충신 중후(忠信重厚)한 자질로 미루어 경세(經世)의 큰 모유(謀猷)가 되었다. 일찍 이부(二府)에 오르고 네 번 상상(上相)이 되었다. 잘 도모하고 능히 결단하여 계책에는 유책(遺策)이 없었고, 사직을 정하고 천명을 도운 것은 공훈(功勳)이 맹부(盟府)에 있다. 한결같은 덕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우리 국가를 보호하고 다스렸는데, 근자에 고사(故事)를 가지고 나이 늙었다 하여 정사를 돌려보냈다. 그 아량을 아름답게 여기어 억지로 그 청에 따랐다.

 

거듭 생각건대, 삭북(朔北)은 기업(基業)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아 살피려고 하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卿)의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겠는가? 슬프다! 사생(死生)의 변(變)은 인도(人道)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하륜(河崙)은 진주(晉州) 사람인데, 순흥 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麟)의 아들이었다. 지정(至正)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영주(知榮州)가 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 치행(治行)을 제일로 올리니,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제수되어 여러 벼슬을 거치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군사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침범하니, 하륜이 힘써 불가함을 말하였는데,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에 추방하였다.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계유년에 기용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가 되었다. 태조가 계룡산(雞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륜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가 우리의 표사(表辭)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히 보낼지 안 보낼지를 정신(廷臣)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륜이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륜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륜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戱弄)하여 죽음을 구(救)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륜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 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상왕(上王)이 위(位)를 잇자 하륜에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고 정사공(定社功)을 녹훈(錄勳)하여 1등으로 삼고, 작(爵)을 진산군(晉山君)이라 주었다. 경진년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가 되고, 9월에 우정승(右政丞)이 되매 작을 승진하여 백(伯)으로 삼았다. 11월에 임금이 즉위하자 좌명공(佐命功)을 녹훈하여 1등으로 삼았다. 신사년 윤3월(閏三月)에 사면하였다가 임오년 10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어 영락 황제(永樂皇帝)의 등극(登極)한 것을 들어가 하례하는데, 하륜이 명(明)나라에 이르러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爵命)을 고쳐 주소서.”하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기어 계미년 4월에 명나라 사신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인장(印章)을 받들고 왔다. 임금이 더욱 중하게 여기어 특별히 전구(田口)를 주었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사면하기를 빌고, 을유년 정월에 다시 복직하였다가 정해년 7월에 또 가뭄으로 사피하기를 청하였다. 기축년 겨울에 이무(李茂)가 득죄하자 온 조정이 모두 베기를 청하였는데, 하륜이 홀로 영구(營救)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하륜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하였다. 을미년 여름에 이직(李稷)이 그 향리에 안치(安置)되었는데, 하루는 하륜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내전에서 인견하였다. 하륜이 말이 없이 웃으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하륜이 대답하기를, “이직의 죄가 외방(外方)에 내칠 죄입니까?”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임진년 8월에 다시 좌정승이 되고 갑오년 4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금년 봄에 이르러 나이 70으로 치사(致仕)하기를 비니,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륜이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나갔다.

 

하륜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端委] 차림으로 묘당(廟堂)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한 것이 대단히 많았으나,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불급(不及)한 듯이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미미(亹亹)하게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불씨(佛氏)와 노자(老子)를 배척하여 미리 유문(遺文)을 만들어 건사(巾笥)에 두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섬실(纖悉)하고 주비(周備)하였다. 또 상사(喪事)와 장사(葬事)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하륜이 죽은 뒤에 그 글이 나오니, 그 집에서 그 말과 같이 하였다. 자호(自號)는 호정(浩亭)이요, 자(字)는 대림(大臨)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아들은 하구(河久)와 서자(庶子)가 세 사람인데, 하장(河長)·하연(河延)·하영(河永)이었다. 하륜이 죽자 부인 이 씨(李氏)가 애통하여 음식을 먹지 않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임금이 듣고 약주(藥酒)를 하사하고 전지하기를,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 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하였다. 이 씨가 사람을 시켜 승정원(承政院)에 나와 상언하기를,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체를 서울 집에 들여와 빈소(殯所)하게 하소서.”하니, 명하여 예조(禮曹)에 내리어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이어서 전지하기를, “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이러한 의논이 있었다.”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명을 받들고 죽으면 대부(大夫)·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제문(賜祭文)

 

•태종사제문충공하륜문(太宗賜祭文忠公河崙文)

졸기(卒記)의 내용 참조.

 

•세종대왕사제진한국대부인이씨문(世宗大王賜祭辰韓國大夫人李氏文)

세종 3년(1421, 辛丑) 1월 19일(壬午)

상왕이 내신(內臣) 정원용(鄭元龍)을 보내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의 아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이 씨에게 제사를 내렸으니, 그 제문의 대략은, “진산(晉山)이 이미 가서 통석(痛惜)의 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는데, 부인이 먼저 가니 조상하고 구휼하는 법전을 여기 내리나니, 정숙한 혼이라도 이 우대하는 글월을 알아주기 기대하노라.”하였다.

 

•정조대왕친제제문충공하륜문(正祖大王親製祭文忠公河崙文)

1799년 기미(己未, 正祖 23) 11月 17日(維歲次己未十一月十七日)

국왕께서 근신 우부승지 조홍진을 보내어 고 영의정 진산부원군 문충공 하륜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노라.

우리 왕가의 왕업이 처음 일어날 무렵 호준한 무리가 구름처럼 일어나, 선후를 따랐으니 정기가 매우 빛났네, 진양의 망족(望族)으로서 대대로 빛나게 벼슬이 이어졌으니 산하가 아름다운 기운을 모으고 하늘이 훌륭한 보좌를 내렸네, 일월이 서로 바뀌는 즈음 천지가 정돈되지 않았을 때 경륜을 발휘하여 굉요(宏夭) 산의생(散宜生)과 덕을 같이하니 나라의 명이 새롭게 되었네, 술잔의 술 넓고 깊어 우리 희어(羲馭)를 도우니 물고기가 물에 있는 듯 이윤(伊尹) 여상(呂尙)과 백중의 형세였네. 세 임금으로부터 철권을 받고 이십년이 넘게 황각에 있었으니 국정의 큰 계책을 따로 올려서 대경(大經)을 세우고 세목(細目)을 베풀었네. 천지가 이미 정돈되매 산악처럼 굳건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이에 처음의 뜻을 따라 물러나매 임금의 행차가 임하여 궁궐의 술을 내렸네. 강한(江漢)이 아득히 넓으매 보묵이 향을 흘리고, 공전에 세금을 물리지 않으매 농사가 풍요한 결실을 이루었네. 남토의 선비들 탄식하여 말하기를 향사당이 오래되었는데 우리 어른께서 이르러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의 생각이 침묘(寢廟)를 참배함에 배로 더하는지라 정령에게 잔을 드리려 해읍(海邑)에 제관을 보내네.

 

문충공 하륜 계후사 예조 입안문(文忠公河崙繼後事禮曹立案文)

 

•영조대왕 50년 甲午(1774년) 5월  일

아래 입안(立案)은 후손을 잇는 일에 관한 것인데 이번에 상신(上申)하여 하교(下敎)하셨다.

경상도 진주에 사는 유학(幼學) 하응청(河應淸), 함양에 사는 유학 하봉(河봉) 등이 임금님 앞에 상언(上言)을 바쳤는데 그 내용에 “삼가 아뢰기를, 신(臣)은 스스로 엎드려 생각건대 공적을 기록하고 제사를 드려 보답하는 것은 조정의 좋은 법전이고 망한 것을 보존하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것은 성인(聖人)의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진실로 국가에 큰 공훈이 있어서 백세(百世)에 부조(不祧)의 제사를 받는 자도 간혹 후손이 끊어져서 외로운 혼(魂)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면 이는 개인 집안의 깊은 슬픔일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공훈이 있는 신하에게 보답하는 도리에도 또한 은전에 큰 결점이 되기 때문에, 신들이 몸소 외람되어 죽음을 기꺼이 무릅쓰고 임금님 앞에서 우러러 부르짖습니다. 신의 11대 방조(旁祖)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은 훈업(勳業)과 문장(文章)이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고, 좌명(佐命) 일등의 원훈(元勳)에 들어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있사온즉 사가(私家)에서도 ‘영원히 합사(合祀)하지 않는 제사[不祧]를 드려야 할 것이나 불행하게도 중간에 후손이 없어져 종중의 제사가 끊어졌습니다. 백세토록 부조(不祧)의 제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천추(千秋)에 주인 없는 혼이 되는 것을 벗어날 수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은 비록 방손(旁孫)이지만 스스로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 슬픈 느낌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엎드려 생각건대, 신의 선대(先代)에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 사육신(死六臣) 중의 하위지(河緯地)가 있는데 세 파(派) 중에서 문충공의 집안이 그 종파(宗派)이므로 더욱 후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음을 여러 종족(宗族)들과 상의하여 별묘(別廟)를 세우고자 하는데 제사를 주관할 자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 의논에서 동의를 구하니 그 결과 하계룡(河繼龍)의 아들 한통(漢通)을 문충공에게 드릴 제사를 주관하는 자손[主祀孫]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집안의 어른들과 종손이 문기(文記)를 작성하여 진주목(晉州牧)과 감사(監司)에게 바쳐 입지(立旨)를 받은 것입니다.”라 하였습니다.

 

예조(禮曹)에서 예사(禮斜)를 내고자 하였으나 이 일은 보통의 격식과 달라서 상례에 따라서 처리하기가 옳지 않은 것 같고, 종사(宗社)에 절의(節義)와 공로가 있어서 영원히 부조(不祧)하는 자에 대하여는 방손 중에서 가려서 제사를 주관하는 자를 정하여 주는 것은 본래 조정의 법령 갑조(甲條)에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상께서 공훈을 기록하고 끊어진 자손을 이어주는 마음으로 특별히 슬프게 여기셔서 해당 부서에 명하여 입안(立案)을 성급(成給)하게 하여 문충공 하륜의 제사를 영원히 주관하는 일이 특별히 임금님의 은혜를 입기를 바라는 까닭으로 아뢰온 일의 근거를 잘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4월 29일 대신과 비국(備局 : 비변사)의 당상관들을 불러들여 들어가서 임금님을 알현할 때, 예조판서 민모(閔某)가 아뢰기를, “이번에 내려 주신 몇 장의 상언(上言)을 모두 심의하여 상주(上奏)하였으나 그 중에서 상언 2장은 법식에 따라서 처리할 수 없어 감히 말씀드립니다. 진주에 사는 유학 하응청(河應淸)은 상언을 통하여, ‘그 11대 방조 영의정 하륜은 원훈(元勳)으로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나 그 종파(宗派)에서 제사가 끊기어 위탁할 곳이 없어 여러 방손들이 상의하여 하계룡(河繼龍)의 아들 한통(漢通)을 주사손(主祀孫)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보통 격식과 달라 신의 부서에서 법식에 따라 처리할 수 없어서 심의를 한 뒤에 상주(上奏)하게 되었습니다. 대신들에게 물으셔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님께서 이르기를, “대신들의 뜻은 어떠합니까?”라고 하셨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제사를 잇지 못하는 것에 대한 처리의 근거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하자,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대답하기를, “죽은 재상 이양원(李陽元) 집안에 제사를 지낼 자손이 끊어졌는데 그때에 특별히 하교(下敎)하여 제사를 주관할 후손을 세우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의 예가 이미 많이 있었다고 하니 특별히 봉사손(奉祀孫)을 세우게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셨으니 이 건을 윤허한 것으로써 앞의 하한통(河漢通)을 고(故) 영의정 하륜(河崙)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삼고 마땅히 입안(立案)을 이루어서 발급할 것.

 

 英祖大王 甲午 五月  日

右立案爲繼後事 節 啓下敎 慶尙道晉州居幼學臣河應淸 咸陽居幼學臣河金鳳等駕前上言內 右 謹啓 臣矣段臣矣身等 伏以記功報祀 朝家之令典 存亡繼絶 聖人之懿訓 苟有大勳勞於邦家 爲百世不祧之祀者 其或後嗣零替 孤魂無依 則不但爲私門之深痛 在朝家 報功臣之道 亦爲一大欠典是白乎等以 臣矣身等不避猥越冒死 仰籲於法駕之前爲白齊 臣矣身十一代旁祖故領議政諡文忠公臣河崙勳業文章 載在國乘 入於佐命一等元勳 配享於廟庭是白乎 則在私家 亦當爲永世不遷之祀是白乎矣 不幸中間 後孫殘滅 宗祀遂絶 以百世不祧之人 不免作千秋無主之魂 寧不痛哉 臣矣身等 雖以旁孫 自切霜露悽悵之感 而且伏念 臣矣身先代有文孝公臣演 襄靖公臣敬復 及六臣中緯地 數三派中 文忠公家 爲其宗派 則尤不可使絶嗣乙 仍于諸宗相議 將立別廟 而不可無主祀之人 故採同僉議 果以繼龍子漢通 定爲文忠公主祀孫爲白遣 門長及宗孫 草成文記 卽呈于本官及監司 成出立旨是白乎等以 方欲呈出禮斜於禮曺爲白乎矣 事異常格 似不當循例爲之 而凡有節義功勞於宗社 永世不祧者 則擇於旁孫 定給主祀 自有朝家令甲是白如乎 伏乞 聖慈特軫記功繼絶之念 亟命該曺出給立案 以爲文忠公臣河崙 永世主祀事 特蒙天恩爲白良結  望良白去乎 詮次 善啓事據 今四月二十九日 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時 禮曺判書閔所啓 今番所下上言 幾皆回 啓 而其中二張 不可循例爲之者 敢此仰達矣 晉州居幼學河應淸上言 以爲其十一代旁祖故領議政河崙 以元勳 至於配享廟庭 而宗派中絶香火 靡托 諸孫相義 以河繼龍之子漢通 定爲主祀孫 而事異常格 臣曺不得循例 回 啓 下詢大臣 處之如何

上曰 大臣之意 何如 領議政金尙喆 曰 昭穆之不繼 何以知之乎 右議政元仁孫曰 故相臣李陽元家 昭穆不繼 而其時因特敎立後矣

上曰 故例已多 特許立後 可也 事啓下爲有等以 向前河漢通乙 立爲故領議政河崙奉祀孫爲遣 合行立案者

 

문충공(文忠公) 계후사(繼後事)에 관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초(抄)

 

•영조 50년(1774년) 4월 29일 辛亥

갑오(甲午) 4월 29일 묘시(卯時)에 임금님이 집경당(集慶堂)에 계시면서 대신과 비국(備局) 당상관들을 불러 들여 입시(入侍) 할 때 …… 〈중략〉 ……

임금님이 “거조(擧條)를 내라”라고 하시자, 민백흥(閔百興)이 아뢰기를, “금번 소하(所下) 상언 중에 몇몇은 모두 회계(回啓)하였으나, 그 중에 두 장(張)은 전례(前例)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것이라, 감히 이에 아룁니다.

진주에 사는 유학(幼學) 하응청 상언(上言)에, ‘그의 11대 방조(旁祖) 옛 영의정 하륜(河崙)은 원훈(元勳)으로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나 종파(宗派)가 중간에 끊어져, 제사를 맡을 곳이 없습니다. 여러 자손들이 서로 의논하여 하계룡(河繼龍)의 아들 한통(漢通)을 큰 사손(祀孫)으로 정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件)은 상격(常格)과 달라, 예조(禮曹)에서 전례에 따라 회계(回啓)할 수 없으니, 대신(大臣)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님이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소목(昭穆)을 잇지 못하는 이 건은, 어떤 전거(典據)로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이르기를, “옛 재상 이양원(李陽元)의 집안에 소목이 이어지지 않자 그때 특별히 하교하시어 봉사손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님이, “옛 전례에 이미 그런 경우가 많으니, 특별히 입후(入後)를 허락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시며, “다른 거조(擧條)를 올리라.”라고 하셨다. 〈후략〉

임금님이 대신들에게 물러나기기를 명하자 모든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甲午四月二十九日卯時, 上御集慶堂. 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時, ……〈중략〉……. 出擧條 閔百興曰, 今番所下上言, 幾皆回啓, 而其中二張, 不可循例爲之者, 敢此仰達矣. 晉州居幼學河應淸上言, 以爲其十一代旁祖, 故領議政河崙, 以元勳至於配享廟庭, 而宗派中絶, 香火靡托, 諸孫相議, 以河繼龍之子漢通, 定爲王祀孫, 而事異常格, 臣曹不得循例回啓, 下詢大臣處之, 何如? 上曰, 大臣之意, 何如? 領議政金相福曰, 昭穆之不繼, 何以知之乎? 右議政元仁孫曰, 故相臣李陽元家, 昭穆不繼, 而其時因特敎立後矣. 上曰, 故例已多, 特許立後, 可也. 出擧條 又啓曰, 平壤幼學金興垕上言, 以爲其從高祖晉興君金良彦, 以勳臣無後, 香火靡托, 諸宗相議, 以從孫昌雲, 欲爲立後, 事係移宗, 不可循例回啓, 令道臣詳査狀聞處之, 何如? 上曰, 見其祖同是孫, 特許立後, 可也. ……〈중략〉…… 上命退, 諸臣以次退出.

 

•영조 50년(1774년) 5월 19일 辛未

갑오(甲午)년 5월 19일 신시(申時)에, 임금님이 집경당(集慶堂)에 계시며, ……〈전략〉…… 천신(賤臣)에게 명하여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신라사(新羅史)』 여주권(女主卷)과 『명사(明史)』에 나오는 유구국(琉球國)의 사건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하셨다. 또 응지인(應旨人)을 불러 입시케 하셨다.

신(臣) 경환(景煥)이 어명을 받들어 유신(儒臣) 남강로(南絳老)·임득호(林得浩), 유생(儒生) 이태수(李泰壽)·하한통(河漢通), 전 역관(譯官) 이종염(李宗聃)과 함께 들어와서 부복(俯伏)하였다. ……〈중략〉…….

하한통(河漢通)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기를, “신(臣)은 본래 영남사람으로 지난번에 조정에서 옛 재상 하륜(河崙)의 후사(後嗣)가 되어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므로, 신의 종중(宗中)에서 신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이미 할아버지까지[조부까지 봉사손으로 사당에 위패를 봉안하는 것]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위(妣位)를 병설(竝設)하는 여부(與否)를 예조(禮曹)에 묻고자 상경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님이 이르기를, “네가 제사를 받드는 일에 무슨 문제될 게 있는가?”라고 하자, 임득호(林得浩)가 이르기를 “서원(書院)과 다르므로, 고위(考位)가 있으면 비위(妣位)를 종향(從享)하는 것은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금님이 말씀하시기를 “옳다.”라고 하시고 물러가게 하였다.

 

甲午五月十九日申時, 上御集慶堂 ……〈전략〉…… 命賤臣招儒臣, 持羅史女主卷. 明史琉球國事入侍, 又招應旨人入侍. 臣景煥, 承命與儒臣南絳老·林得浩, 儒生李泰壽·河漢通, 前譯官李宗聃諧[偕]入進伏. ……〈중략〉…… 河漢通進前曰, 臣本嶺人, 向者朝令, 以故相臣河崙立後主祀, 故臣之宗中, 以臣主祀, 而旣達之祖, 以朝令立主, 而妣位竝設與否, 欲稟於禮曹而來矣. 上曰, 汝之奉祀事, 有何可問者乎? 林得浩曰, 異於書院, 有考位則妣位之從享, 自可知矣. 上曰, 然矣. 命退去.

 

•정조 23년(1799년) 8월 24일 庚戌

김달순(金達淳)이 충훈부(忠勳府)의 말로써 아뢰기를, “정령(政令)에, ‘헌릉(獻陵)에 전알(展謁)하는 일은 옛날 세종(世宗)조부터 행하여 오다가 효종(孝宗) 조에는 행하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중략〉…… 그리고 선조(先朝-英祖) 때에 또한 훈신(勳臣)의 후예(後裔)를 방문(訪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훈부(勳府)에 명하여 각 파 적장인(嫡長人)의 성명을 상고(詳考)하고, 비록 충의위(忠義衛)이더라도 들은 일을 열록(列錄)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태종(太宗)조의 좌명공신(佐命功臣) 38인의 적장손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과 아직 이름을 기록하지 못한 자는 구별하여 열록(列錄)하고 별단(別單)에 써 넣어서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길, “알았노라. 이미 이름이 기록된 좌명공신(佐命功臣) 적장손(嫡長孫) 열여덟 집중에서 충의위를 받지 못한 아홉 집 적장손은 즉시 초기(草記)를 발급하라. 그 중에서 양소공(襄昭公)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적장손 이종회(李宗恢)는 이판(吏判)에 명하여 불러보고 수령이 합당하면 수령을 제수하고 단지 승진만 시켜줄 만하면 승직을 시켜라.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영의정 문충공 하륜(河崙)의 적장손 하용빈(河龍彬)은 참봉에 알맞으니 알맞은 자리를 기다렸다가 쓰도록 하라. ……〈중략〉……. 의안대군(義安大君) 묘와 일등 공신 하문충공(河文忠公) 묘에는 승지를 보내어 날을 잡아 제사하라. 제문은 마땅히 친히 쓸 것이다.”하였다 ……〈후략〉…….

 

金達淳, 以忠勳府言啓曰, 傳曰, 獻陵展謁, 昔在世宗朝行之, 至孝廟朝, 欲行之而未果, ……〈중략〉…… 而先朝亦有訪問勳臣後裔之命. 令勳府詳考各派嫡長人姓名, 雖忠義, 連皆爲之列錄以聞事, 命下矣. 太宗朝佐命功臣三十八人嫡長孫, 時存人及未錄名, 區別列錄, 別單書入之意, 敢啓. 傳曰, 知道. 佐命功臣嫡長十八家已錄名中, 九家嫡長之未付忠義者, 卽付草記. 其中義安大君贈諡襄昭公嫡長孫令李宗恢, 令吏判招見, 可合百里, 則除百里, 只可陞敍, 則(陞敍)卽爲陞敍. 晉山府院君領議政文忠公河崙嫡長孫忠義衛河龍彬, 當窠參奉, 待窠調用, ……〈중략〉…… 義安大君墓, 一等功臣河文忠公墓, 遣承旨卜日致祭, 祭文當親撰, ……〈후략〉…….

 

•정조 23년(1799년) 8월 25일 辛亥

김달순(金達淳)이 충훈부(忠勳府)의 말로써 아뢰기를, “‘좌명공신 적장손(嫡長孫)을 초기(草記)의 별단(別單)에 써 넣었습니다.’라고 하자, 상(上)께서 ‘알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훈부에 녹명(錄名)한 좌명공신 적장자 열여덟 집안 중에서 적장손에게 아직 충의군(忠義軍)을 주지 않은 자는 즉시 초기(草記)를 넘겼습니다. 그 초기(草記)에는 ‘양소공(襄昭公) 의안대군(義安大君) 적장손 이종회(李宗恢)는 이판(吏判)에게 불러서 보고 수령을 주는 것이 합당하면 수령을 주고, 단지 벼슬만 올려주어도 될 만하면 즉시 벼슬을 올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영의정 문충공 하륜(河崙)의 적장손 충의위(忠義衛) 하용빈(河龍彬)은 참봉(參奉)을 주는 것이 마땅하므로 알맞은 자리가 나면 임용하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의안대군(義安大君)의 묘와 일등공신(一等功臣) 하문충공(河文忠公) 묘는 승지를 보내어 날을 잡아 제사하되 제문(祭文)은 마땅히 친히 짓고, 그 외 일등공신인 상당군, 한산군, 취산군 묘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전교하여 명을 내렸습니다. ……〈중략〉…….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 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의 후손은 지금 널리 찾아내겠다는 뜻을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님께서 “알았노라”라고 하였다.

 

金達淳, 以忠勳府言啓曰, 佐命功臣嫡長孫別單書入草記, 傳曰, 知道. 佐命功臣嫡長十八家已錄名中, 九家嫡長之未付忠義者, 卽付草記. 其中義安大君贈諡襄昭公嫡長孫令李宗恢, 令吏判招見, 可合百里, 則除百里, 只可陞敍, 則卽爲陞敍. 晉山府院君領議政文忠公河崙嫡長孫忠義衛河龍彬, 當窠參奉, 待窠調用, ……〈중략〉…… 義安大君墓一等功臣河文忠公墓遣承旨卜日致祭祭文當親撰 而此外一等上黨漢山鷲山墓遣禮官致祭可也事命下矣……〈중략〉……上黨君李佇, 鷲山君辛克禮後孫, 今方廣加搜訪之意, 敢啓. 傳曰, 知道.

 

•정조 23년(1799년) 10월 18일 癸卯

기미(己未) 10월 8일 진시(辰時)에, 상(上)이 희정당(熙政堂)에 계시면서, 전경문무신(專經文武臣), 한학문신(漢學文臣), 일차유생(日次儒生)을 전강(殿講)할 때, 대신(大臣)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불러들여 입시하게 하였다. ……〈중략〉……

예조판서 김문순(金文淳)이 말하기를,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묘가 양주(楊州) 땅에 있다고 하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진주(晉州)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찾아서 보고할 것을 경기도와 경상도에 관문(關文)을 보냈었습니다.

진주목사(晉州牧使) 윤노동(尹魯東)이 보고한 것을 보니, 문충공의 묘는 주(州)의 북쪽 오이방(梧耳坊)에 있는데 옛 빗돌은 이지러지고 부러져서 전해지지 않고 병신(丙申)년에 짧은 비갈(碑碣)을 다시 세웠고, 읍지(邑誌)에 실린 비문과 사적(事蹟)을 기록한 글도 어긋남이 없어 말에 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주목사(楊州牧使) 서영보(徐榮輔)의 보고에는 양주 삼각동(三角洞)에 한 고분이 있는데 옛 늙은이들이 하정승(河政丞)의 묘라고 전해 들었다고 하는데 이미 비갈도 없고 끝내 믿을 만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문충공의 묘가 양주에 있다는 말은 비록 이른바 적장손 하용빈(河龍彬)에게서 나왔으나, 두 고을에서 보고한 것으로 본다면 양주 운운한 것은 지극히 허황되고 진주에서 보고한 것은 이처럼 명확하므로 치제(致祭) 날짜를 다시 잡아서 진주 묘가 있는 곳에서 제사함이 마땅한 일입니다.

 

적장손의 문제에 있어서는 뒤에 올린 진주목사 보고를 보니 문충공의 자손 하경석(河慶碩)이 함양(咸陽) 땅에 사는데, 그의 아버지 한통(漢通)이 갑오년에 상언(上言)을 올려서 직접 ‘봉사입안(奉祀立案)’을 발급받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조(禮曹)에 등록된 것을 살펴보니, 진주 유학 하응청(河應淸) 등이 상언(上言)한 것에, 문충공 하륜 종파(宗派)는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에 그의 방손 한통(漢通)을 봉사손으로 확정한 건은 경연(經筵)에 진달되어 상(上)이 윤허하여 입안이 발급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봉사손을 정해 놓고 충훈부(忠勳府)가 소홀하게 다시 용빈(龍彬)을 적장손으로 삼은 것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듣건대, 용빈(龍彬)은 그 본명이 아니고 이미 말로 전해지고 있는 남의 이름을 모칭(冒稱)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건의 해괴함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으니 충훈부에 명하여 지금껏 사정(査正)하게 한 것이 결단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감히 진달합니다.”라고 하였다.

 

우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예조판서가 아뢰는 바를 지금 듣건대, 이른바 하용빈(河龍彬)의 사건은 매우 놀랍고 비통한 일입니다. 주인도 없는 산을 진산군의 묘라고 속이고 봉사손이 아니면서 봉사손이라고 칭탁하고 심지어 충훈부에 이름을 빌려서 명부(名簿)를 모욕한 것은 그 죄상을 논하면 크게 윤기(倫紀)에 관련됩니다. 예조(禮曹)에서 진위(眞僞)를 상세히 조사한 것에서부터, 대신(臺臣)들 또한 발계(發啓)하여 상(上)의 윤허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용빈(龍彬)의 죄상(罪狀)은 마땅히 율(律)에 따라 감처(勘處)하여야 하고, 진위(眞僞)를 캐지 않고 훈부(勳府)에 이름을 올리게 한 것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현고(現告)케 하고 견파(譴罷)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중략〉…… 대간(臺諫)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자 집의 심규로(沈奎魯)가 아뢰었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와 양사(兩司)의 합계를 간원(諫院)에서 준비하지 못하였으므로 오늘 그만 정지합니다. 헌부(憲府)에서는 전계(前啓)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신계(新啓)는 있는가?”라고 하자 규로가 “있습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아뢰었다. “근래 인심(人心)이 구렁텅이에 빠지고, 명교(名敎)가 무너져서, 벌레처럼 구물거리는 무식한 무리들이, 환부역조(換父易祖)하여 윤기(倫紀)에 죄를 짓는 사건들이 잦습니다. 지금 경연에 나와서 하용빈의 사건을 들으니, 곧 괴이한 변고입니다. 문충공 하륜(河崙)이 어떤 원훈(元勳) 명상(名相)인데, 용빈(龍彬)이 그의 조상이 아닌데도 직손(直孫)으로 모칭(冒稱)한 것은 매우 해패(駭悖)하고, 또한 지난번에 전 영장(營將) 정광빈(鄭光賓)이라는 자도 옛 감사 정백창(鄭百昌)의 손자로 모칭한 것을 들으니, 용빈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이와 서캐같이 비천한 무리들이라 비록 책망하기도 부족하나, 사건이 명교(名敎)와 풍화(風化)에 관계되므로 죄상을 논할 가치도 없지만 논죄(論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하용빈과 정광빈을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율(律)에 따라 엄하게 처벌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上)께서, “아뢴 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己未十月十八日辰時, 上御熙政堂. 專經文武臣漢學文臣, 日次儒生殿講, 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 ……〈중략〉……. 晉山府院君文忠公河崙墓, 在於楊州地云. 而輿地勝覽, 則以在於晉州載錄. 故詳探報來之意, 發關兩道矣. 卽見晉州牧使尹魯東所報, 則文忠公墓, 在於北梧耳坊, 而舊碑缺折無傳, 丙申重立短碣, 邑誌所載碑文記蹟, 亦無差爽爲辭, 而且接楊州牧使徐榮輔所報, 則本州三角洞, 有一古墓, 古老傳稱河政丞墓, 而旣無碑碣, 終難準信爲辭矣. 文忠公墓, 在楊州之說, 雖出於所謂嫡長孫河龍彬, 而以兩邑所報觀之, 楊州云云, 極爲虛謊, 晉州邑報, 如是明的, 致祭日字, 更擇設行於晉州墓在之地, 恐合事宜, 而至於嫡長孫事, 追見晉州牧使所報, 則文忠公子孫河慶碩, 在咸陽地, 持其父漢通甲午年呈上言, 出奉祀立案來現云. 故取考臣曹謄錄, 則因晉州幼學河應淸等上言, 文忠公河崙宗派中絶, 以其旁孫漢通, 定爲奉祀事, 筵達蒙允, 成給立案矣. 旣定祀孫, 則勳府之忽以龍彬爲嫡長孫者, 未知有何所據, 而且聞龍彬, 非渠本名, 乃冒他人已口傳之名云. 事之怪駭, 莫甚於此, 更令勳府, 趁今査正, 斷不可已. 故敢此仰達矣. 時秀曰, 今聞禮曹判書所奏, 所謂河龍彬事, 萬萬駭痛, 無主之山, 托以晉山之墓, 非祀孫而假稱祀孫, 至於假名冒錄於勳府者, 論其罪狀, 大關倫紀而已. 自禮曹詳査眞僞, 臺臣又發啓蒙允, 龍彬罪狀, 自當如律勘處, 不覈眞僞, 許其冒錄勳府, 難免其責, 當該堂上, 捧現告施以譴罷之典,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중략〉…… 命臺諫進前. 奎魯曰, 三司合啓, 兩司合啓, 以諫院不備, 今日姑停, 憲府則無前啓矣. 上曰, 新啓則有之乎? 奎魯曰, 有之矣. 仍奏曰, 近來人心陷溺, 名敎斁敗, 蠢蠢無識之輩, 比比有換父易祖, 得罪倫紀之事矣. 卽於筵中, 伏聞河龍彬事, 則卽一變怪事也. 文忠公河崙, 是何等元勳名相, 龍彬之非其祖而冒稱直孫者, 萬萬駭悖, 又於向時, 伏聞前營將鄭光賓者, 冒稱故監司鄭百昌之孫者, 亦與龍彬, 別無異同, 如渠蟣蝨卑賤之輩, 雖不足責, 而事實關係於名敎風化, 亦不可以不足論而不論也. 請河龍彬·鄭光賓, 令有司照律嚴繩. 上曰, 依啓.

 

•정조 23년(1799년) 10월 20일 乙巳

이상도(李尙度)가 형조(刑曹)의 언론(言論)으로 아뢰기를, “집의(執義) 심규로(沈奎魯) 아뢴 바에, 문충공 하륜(河崙)은 어떤 원훈(元勳) 명상(名相)인데, 용빈(龍彬)이 그 할아버지가 아닌데도 직손(直孫)으로 모칭한 것은 매우 해패(駭悖)한 짓이니, 유사(有司)에 명하여 율(律)에 따라 엄히 처벌할 것을 비지(批旨)로 허락하시고 아뢴 대로 처벌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율문(律文)을 살펴보니, 『대전통편(大典通編)』 군사환속조(軍士還屬條)에, 「충의위(忠義衛) 명부(名簿)를 모독한 자는 장형(杖刑) 후에 정배(定配)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용빈(河龍彬)을 일백 대의 곤장을 친 뒤에, 평안도 삭주부(朔州府)로 정배(定配)하여 압송할 것을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상(上)이 전교하기를, “어찌 모칭하는 것이 상정(常情)이겠는가? 설령 그렇게 하였다고 하여도 모두 문충공의 자손일 것이다. 반드시 이는 충훈부에서 자세하게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니, 공율(公律)로 수속(收贖)하고 석방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李尙度, 以刑曹言啓曰, 執義沈奎魯所啓, 文忠公河崙, 是何等元勳名相, 龍彬之非其祖而冒稱直孫者, 萬萬駭悖, 令攸司照律嚴繩事, 批旨內, 依啓事, 命下矣. 取考律文, 則大典通編軍士還屬條有曰, 冒錄忠義衛者, 杖配, 河龍彬, 決杖一百後, 平安道朔州府定配所押送之意, 敢啓. 傳曰, 寧有冒稱之常情乎? 藉或其然, 均爲文忠之孫也, 必是該府之不能照察, 以公律, 收贖放送, 可也.

 

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 및 충훈부등록(忠勳府謄錄) 초(抄)

 

•定社功臣會盟錄(太祖 7년 1398년)

維歲次戊寅十月朔癸卯初九日辛亥 -中略- 謹以淨酌大牢式陳明薦尙饗

-中略-

奮忠仗義定社功臣資憲大夫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事知經筵事晉山君臣河崙

-以下省略

•佐命功臣會盟錄(太宗1년 1401년)

維歲次辛巳二月朔庚寅十二日辛丑 -中略- 謹以淨酌大牢式陳明薦尙饗

-中略-

奮忠仗義靖難定社佐命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議政府兵曹事寶文閣大學 士晉山府院君臣河崙

-以下省略-

•三功臣會盟錄(太宗 4년 1404년)

維歲次丁酉四月朔丁巳十一日丁卯 -中略- 謹以淸酌大牢式陳明薦尙饗

-前略- 定社佐命功臣嫡長都摠制臣河 久 -以下略-

•五功臣會盟錄(世祖 2年 1456년)

維歲次丙子十一月朔庚子十四日庚辰 -中略-

定社佐命功臣長孫折衝將軍行右軍司正臣河福生 -以下略-

•六功臣會盟錄(世祖 13년 1467년)

維歲次丁亥十月朔癸巳二十七日己未 -中略-

定社佐命功臣長孫承義副尉行忠佐衛後部副司猛臣河厚 -以下略-

•九功臣會盟錄(中宗元年 1506년)

維歲次丙寅十月朔丙午十九日甲子 -中略-

定社佐命功臣嫡長孫建功將軍行忠佐衛副司果臣河光胤 -以下略

•十二功臣會盟錄(宣祖 23년 1590년)

維萬曆歲次庚寅八月庚午朔二十五日甲午 -中略-

定社佐命功臣河崙長孫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果臣河應珠 -以下略-

•忠勳府謄錄

忠勳府 啓目節呈錦平君鄭砯單子內 -中略- 佐命功臣晉山府院君河崙長孫繼淸已曾   身死其子大源長孫當次 -中略- 依他嫡長施行何如順治八年四月初八日同副承旨臣鄭   次知 啓依允 延陽府院君臣李(手決)    (1651년 孝宗2년)

•二十功臣會盟錄(肅宗 6년 1680년)

維康熙十九年歲次庚申八月丁巳朔三十日丙戌 -中略-

定社佐命功臣河崙長孫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勇臣河大源 -以下略-

•二十一功臣會盟錄(英祖 4년 1728년)

維雍正六年歲次戊申七月庚戌朔十八日丁卯 -中略-

定社佐命功臣河崙嫡長孫學生臣河廷彦 -以下略-

※참고(參考)

·三功臣 : 開國·定社·佐命功臣

·六功臣 : 開國·定社·佐命·靖難·佐翼·敵愾功臣

·九功臣 : 開國·定社·佐命·靖難·佐翼·敵愾·翼戴·佐理·靖國功臣

·十二功臣 : 開國·定社·佐命·靖難·佐翼·敵愾·翼戴·佐理·靖國·光國·平難·扈聖功臣

·二十一功臣 : 開國·定社·佐命·靖難·佐翼·敵愾·翼戴·佐理·靖國·光國·平難·扈聖·宣武·淸難·靖社·振武·昭武·寧社·寧國·保社·奮武功臣

·參席者 : 當時 功臣 및 前 功臣의 長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