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응운(河應運)  1676년(肅宗 2) ~ 1736년(英祖 24)

 

초명(初名)은 응룡(應龍)이요 자(字)는 여등(汝登)이며 호는 습정재(習靜齋)이다. 진사(進士) 증(憕)의 현손이고 생원공(生員公) 명(洺)의 손자요 윤우(潤宇)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소학(小學)을 남달리 좋아해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격몽요결’ 역시 소학 못지않게 아끼면서 학습의 교재로 삼았다.

 

젊었을 때 문예(文藝)가 이미 숙성해 과거시험 때 쓰는 문장인 공령문(功令文)을 짓는데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당쟁이 극심한 조정에 나가길 꺼려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문장으로서 명성을 드날렸던 창사(昌舍) 손명래(孫命來)는 “이러한 사람을 어찌 다시 보겠는가”라고 하며 교분을 맺었는데, 창사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청천 신유한 같은 사람이 인정한 뛰어난 문장가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농포(農圃)의 후예인 동야(東野) 정상호(鄭相虎)도 “공의 문장은 청아하고 기개가 있어 옛 고문에 뒤떨어지지 않으니 문장의 으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일찍부터 학문의 종지를 ‘정(靜)’자에 두고자 하였는데, 오직 심신을 수양한 후에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습정(習靜)이라 자호하였다. 1721년 진주지역 유림들이 송시열․송준길의 문묘종사를 추진하자 두 아들 재악(載岳)과 필동(必東)에게, “두 선생은 동방의 대현이며 우리 집안의 은인이다. 너희들이 정성을 다하도록 하여라.”하고는 상소에 앞장서게 하였다. 이때 상소는 농포의 현손인 정상호·정상열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는데, 이들은 진양하씨 창주파와 더불어 진주지역 노론세력을 유지하는 양대 축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직접 손으로 유훈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했는데, 가례에 따라 조상을 받들고 소학에 준하여 집안을 가지런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진양속지(晉陽續誌)」에, “하응운의 자는 여등(汝登)이며 생원 명(洺)의 손자이다.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문학과 행동이 일찍 드러났다. 옳고 그름의 분변이 명확하여 일찍이 세 번이나 향시에 급제를 하고서도 신임사화의 참혹함을 본 후로 벼슬을 포기하고 조용히 앉아 성리학을 궁구했다. 인하여 호를 습정이라 짓고 아들 재악과 필동으로 하여금 우암과 동춘당의 문묘종사 상소를 올리게 했다.”라고 기록되었다.

기해보 편수(編修) 때 참여하여 발문(跋文)을 지었으나 게재(揭載)되지 못하고 경인보에 실렸다.

 

배위는 인동장씨(仁同張氏) 군수(郡守) 우극(宇極)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재악(載岳), 사고헌(四顧軒) 필동(必東), 숭호(崇浩)이고 사위는 윤방익(尹邦翼)이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찬 묘표(墓表)가 있고 문집 「습정재집(習靜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