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윤관(河潤寬)  1677년(肅宗 3) ~ 1754년(英祖 30)

 

공의 자(字)는 택후(澤厚)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단지공 진사(進士) 협(悏)의 증손이며 구이당(具邇堂) 달영(達永)의 손자이다. 호군공 형(浻)의 아드님으로 태어나 단지공의 장손인 종숙부 만향당 현(灦)에게 입적되어 단지공 종가를 계승하였다.

 

어릴 때부터 순박하고 효우(孝友)가 남달랐으며 글을 읽을 때는 총오(聰悟)가 남보다 뛰어났으나 현달(顯達)을 바라지 않아 다만 향시에 입격하는 것으로 만족하여 일찍부터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성현의 학문이 좋아 이를 몸소 체득하고자 하였다. 태와 하필청·도와(道窩) 이덕윤(李德潤)·소암 이덕관 등 지역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면서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여 진주가 문향(文鄕)으로 이름나게 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18세기 진주권역의 유림을 대표하였다. 인(忍)을 실천하여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태산 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참을 인(忍)자를 호(號)로 삼았는데, 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비결을 물으니 인(忍)자를 일백 번 써서 대답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재물을 늘리는 일은 뜻을 손상시키고 허물을 더하는 짓이니 심히 옳지 못하다고 하며 자질(子姪)들에게 늘 경계(警戒)하였다. 선대의 문적을 정리하고 아울러 가학(家學)을 위한 서적을 구비하여 가학을 전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창수록(唱酬錄)』과 자신의 문집인 『인재집』을 남겼다. 생정(生庭)의 선공(先公)이 주도하여 『기해보』를 발간할 때 공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기해보』의 저본(底本)으로 파악되는 『무인중수보(戊寅重修譜)』도 공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인중수보』는 근년에 단지 종택(丹池宗宅)에서 발견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15호로 지정되었으며, 진양하씨 족보(族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일찍부터 덕업(德業)을 이루었기에 통덕랑(通德郞) 벼슬에 올랐으며 78세를 일기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배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인제(仁濟)의 따님과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6남 6녀를 두었다. 아들은 응회(應會), 치와(癡窩) 응명(應命), 응유(應兪), 응혁(應赫), 응각(應珏), 응여(應呂)이다. 문집 「인재집(忍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