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에 대한 개괄적 소개

 

하응천(河應天)  1689년(肅宗 15) ~ 1746년(英祖 22)

 

자는 여칙(汝則), 호는 자송당(自訟堂)이다. 죽헌공 성(惺)의 현손으로 송파(松坡) 원(沅)의 손자이며 사호(沙湖) 윤화(潤華)의 장자이다.

 

총명이 숙성(夙成)하여 보통의 아이들과 달라서 겨우 3세에 능히 100여 자(字)를 알았고, 8세에 대학(大學)을 가르치니 발음이 호탕하고 구독(句讀)이 분명했으며, 15세에 과거공부를 익혀 문사(文詞)가 해박하고 필법(筆法)이 굳건하여 누차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경자(庚子, 1720년) 가을 회시(會試)에 응시했는데, 과장(科場)에 들어가는 날 문득 몸이 불편하여 붓을 잡을 수가 없자, 곁에 있던 친구가 그 증세(症勢)가 심함을 걱정하면서 대필(代筆)해 주겠다고 하니,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과거(科擧)는 장차 임금을 섬기려는 것이다. 임금을 섬기고자 하면서 자기 마음을 먼저 속이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자기를 굽히고 남을 따르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다.” 하고는 드디어 호연히 집으로 돌아와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강학(講學)만을 일삼아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성리(性理)의 글들을 연구하였으며, 성수(星數)와 의복(醫卜)에 관한 서책에도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서경(書經) 황극(皇極)과 역학(易學) 계몽(啓蒙)에 더욱 정묘하여 설중매(雪中梅)를 보고 태극(太極)의 동정(動靜)을 깨달았다. 더욱 주자(朱子)의 글들을 좋아하여 반복 탐구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정자(正字) 허 추(許錘)와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서로 정밀(精密)한 부분까지 강마(講磨)하면서 날로 새로운 점을 터득했고, 사방을 함께 유람하였다. 제생(諸生) 중에 찾아와 질의하는 이는 모두 그 재능에 따라 독실하게 가르쳤다. 고을 수령 윤노동(尹魯東)이 유일(遺逸)을 천거하면서 공을 첫머리로 올렸는데, 그 추천서에 말하기를, “진주 북쪽에 하(河) 선비가 있는데, 밝은 창문 조용한 책상 앞에서 종일토록 공부하는 바가 주자서(朱子書)뿐이다.”라고 하였다.

 

일실(一室)에 거처하면서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책상을 마주하여 끼니를 잊고 종일토록 전념하였다. 사람들을 대할 적에는 가진 것을 모두 베풀고 창고(倉庫)를 전부 비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모(敬慕)하고 심복(心服)했으며, 붕우(朋友)를 대할 적에는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였고, 경전(經傳) 중에서 일용(日用)에 요긴한 것은 그 중요한 말을 모두 초록(抄錄)하여 좌우(座右)에 붙여놓고 날마다 바라보면서 성찰(省察)하였다. 선조를 받드는 범절은 그 정결함이 극진하고 예법과 정성이 아울러 지극했으며 상장(喪葬)과 제사(祭祀)의 의식은 가례(家禮)를 따랐으니 일가(一家)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1719년 기해보(己亥譜) 인간(印刊) 때는 간국유사(刊局有司)로 참여했다. 병인(丙寅, 1746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6세이다.

 

배위는 연일정씨(延日鄭氏) 경리(景履)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점호(漸浩), 자호(自浩)인데 자호(自浩)는 중부(仲父) 응세(應世) 후(后)로 출계(出系)했다. 전원재(田園齋) 유도헌(柳道獻)이 지은 갈명(碣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