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晉陽河氏)의 유래(由來)

 

진양하씨의 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나 진양지(晉陽誌)에 따르면 삼한(三韓:고려시대 우리나라를 일컫던 명칭) 때 진주지방의 토성(土姓)이 넷인데 하씨(河氏), 정씨(鄭氏), 소씨(蘇氏), 강씨(姜氏)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은 상고(詳考)할 자료가 없어 알 수 없고, 진주인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에 처음 등장하는 하씨 성(姓)의 인물은 고려 성종·현종 연간의 하공진(河拱辰) 공이다.

 

문충공 호정(浩亭) 선생께서 조선 정종조(定宗朝)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을, 태종조(太宗朝)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을 받으시고 태종 16년에 선생의 선친(先親) 진양부원군 윤린(允潾) 공의 신도비를 세우셨는데,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비문에 그 선계(先系)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략…… 윗대 조상 가운데 고려(高麗) 때 벼슬해서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낸 휘 공진(拱辰)은 현종(顯宗) 때 공훈이 있어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 휘 탁회(卓回)는 고종(高宗, 1213~1259) 때 벼슬했는데, 부모님이 연로하였기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사(博士 : 卓回)가 정재(挺才)를 낳았고, 정재가 남수(南秀)를 낳았고, 남수가 소(邵)를 낳았고, 소(邵)가 휘 부심(富深)을 낳았는데, 공(公)에게 증조부가 된다. 박사로부터 아래로 4대에 걸쳐 계속해서 과거에 올랐다. 증조부와 그 형님 호(浩) 및 부(扶)도  모두 과거에 올랐다. 나라의 제도에 따라 그 어머니에게 녹(祿)을 지급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조부 휘 식(湜)은 증순충보조공신(贈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강군(晋康君)이다. 부친 휘 시원(恃源)은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정승(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후략……”

 

진양하씨 문하시랑공파(門下侍郞公派)가 공진(拱辰) 공을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은 이에서 그 연원(淵源)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진주(晉州)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하씨(河氏)에는 고려 정종·문종 연간에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 공을 시조로 삼은 사직공파(司直公派)와 고려 중엽에 주부(注簿)를 지낸 하성(河成) 공을 시조로 삼은 단계공파(丹溪公派)가 있다. 사직공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문종(文宗)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된 경재(敬齋) 하연(河演) 선생이 있고, 단계공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세조(世祖)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충렬공(忠烈公)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이 있다. 이상 세 파(派)는 필시(必是) 동원(同源)이지만 분파(分派)·세계(世系)를 알 수 있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각각 시조(始祖)를 달리 하고 있다. 1451년에 경재(敬齋) 하연(河演) 선생이 쓴 ‘진양하씨 족보서’에서도 필시 동원(同源)이지만 분파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 외 하씨로는 강화(江華)를 관향으로 하는 강화하씨, 안음(安陰:現 安義)을 관향으로 하는 안음하씨 등이 있었다고 하나 대체로 진양하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하씨의 관향을 진양(晉陽 : 現 晉州)이라 한 것은 조선 초 태조가 진주목(晉州牧)을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개칭(改稱)한 데서 유래(由來)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