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곡마을

단목마을

대항마을

운문마을

우동마을

병둔마을

서주마을

여사촌마을

선동마을

하봉마을

월횡마을

건지미마을

 

1. 사곡마을

 

소재지: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사곡

 

진주에서 서쪽으로 약 24㎞를 가면 수곡면이 있는데, 면사무소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2㎞를 가면 사곡마을이 있다.

마을의 산세는 지리산 천왕봉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 마지막으로 맴돌아 멈춘 곳이 이곳으로 아늑한 품이 예로부터 거유巨儒 명현明賢이 태어날 고을로 지목되어 왔다.

 

이 마을이 100여 호는 거의 모두가 하씨 성으로 진양 하문의 집성촌이다. 마을 곳곳에 서있는 재실과 정각 서원과 정려 그리고 500년 수령의 와송과 느티나무 등이 일견하여 유서 깊은 선비의 고을임을 알게 해 준다. 고려시대에는 이하리籬下里라고 불렸는데 울타리 밑은 곧 피란처로서 은일지사의 고을이라는 뜻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 뒤 마을 뒷산의 모양이 살쾡이를 닮았고 실제로 삵이 많이 살고 있다하여 삵실 또는 이곡狸谷이라 불려왔고, 이 이름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현재의 행정 구역 명칭 사곡士谷은 고려 말 진주 선비 우곡 정온隅谷鄭溫공이 이 마을을 돌아보고 서당과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여 그의 문집 월아산 기月牙山記에 사기만곡 탁피소회지맥士氣滿谷卓彼昭回之脈이라 읊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은 정곡井谷孝子里孝子 이었으나 후대에 송정 하수일河受一공 증손 석계 하세희河世熙 공께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문행과 부력을 겸비한 반촌으로 200호이상의 세대가 거주하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 변천에 따라 객지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아 지난날의 번창함을 잃었지만 풍속이 온후하고 예와 덕행을 중시하는 마을분위기는 옛날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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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목 마을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

 

단목 마을은 진주에서 대구 의령 방면으로 10㎞정도 가면 도로변에 위치한 진양하씨 문하시랑공파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580여 년간 하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터전이다.

 

덕유산 산맥이 의령 자굴산으로 이어져 자굴산 주맥이 굼틀 굼틀 다시 30여리 내려와 천황산의 두 산자락이 안옥하고 넉넉하게 감싼 곳이 단목 마을이다.뒤로는 수뢰한 천황산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남강이 흐르고 멀리 수려한 월아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옛날부터 문부가 풍부한 반촌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설에 그 형국이 모란꽃 봉우리 같다고 하여 단목丹牧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푸른 고목들이 덮인 산자락에 고색 찬란한 세덕사世德祠와 우뚝한 세덕사 묘정비廟庭碑가 서있다. 세덕사 내 계원사啓源祠에는 시조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고 지미사趾美祠에는 진강군 식晉康君湜공 병판공 거원兵判公巨源공 비순위 을숙備巡衛乙淑공 3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소승사昭繩祠에는 신호위 염神虎衛濂공 직강공 순경直講公淳敬공 두 분의 위패가 모셔 져있다.  그 부속 건물인 염수당念修堂에서는 해마다 조상의 얼을 기리고 종사를 의논하는 종목회宗睦會를 갖는다. 세덕사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벌어져 있는 골에는 각 파별 재실과 오래된 기와집 비각들이 그림처럼 즐비하여 반 천년을 이어져 오는 단목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뜻하다.

 

단목마을은  통찬공을 지낸 기룡起龍공이 사죽리 지금의 단목에 이주 정착한 이래 유수한 학자 지사志士 효열孝烈 들을 배출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고, 하씨가 단목으로 이거 한 이후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단목의 학풍은 계승 발전되어 많은 문한이 배출되었고 가문마다 선조들의 문집과 고문서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하씨가 300여 호 거주하였으나 시대의 변천으로 도시로 각지로 이거하고 지금도 200여호 종원들이 화목하게 살면서 선조의 청덕淸德을 이어받아 예와 덕행을 중시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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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항 마을

 

소재지: 밀양시 부북면 대항리 대항

 

대항마을은 밀양시에서 북족으로 약 8㎞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진양하씨 문하시랑공 후손들의 집성촌이며 550여년 하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 부북은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의 치소治所인 읍성邑城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곳이며 대항大項은 밀양의 진산인 화악산을 북으로 하고 서쪽에는 허항산 형재봉 명방현으로 이어져 다시 동으로 구부러져 동구족으로 감싸고 있다. 남쪽 멀리에는 종남산이 바라보이며 화악산 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舟 같기도 하다고하여 옥호동천행주형玉壼洞天行舟形 이라 찬미했다고 하고 일명수동一名壽洞 이라고도 하였다. 대항에 하씨가 120여호 이상 거주하였으나 시대의 변화로 도시로 이거하고 지금도 40여호의 종원들이 선조의 청독을 이어받아 예와 덕행을 중시하며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다.

 

호군 하비河備공께서 단종의 선위사건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수곡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 하다가 외가가 있는 이곳 대항으로 전거하여 550여년 동안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유수한 효열 잠영簪纓이 속출한 진양하씨 집성촌이다. 마을을 지나 몇 걸음 오르면 화악산 산자락에 웅장하고 날렵하게 보이는 영모재가 우뚝 서있다.

 입향조인 호군護軍의 육세손인 재정再淨號永慕齋이 선조 임진 1592년 에 경북 청송으로 8년간 피란을 갔다가 귀향하여 음관으로 내금위부사정內禁衛副司正을 지냈다. 영모재공 재정再淨은 임란 때 여읜 부모를 영원히 사모 한다는 뜻에서 1599년에 초당을 짓고 공의 호를 따서 영모재 라는 재액齋額을 붙었다.

 

이후 1859년 1914년 두 차례에 중수했으나 영구경비永久傾圮 하여 1956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칸 규모의 팔작형 지붕을 올린 영모재는 종중의 행사나 종원들의 재숙소이다. 호군공께서 입향한 이래 번성하던 종족이 실종되거나 참화를 당하고 하비河備공의 6세손 영모재공 재정永慕齋公再淨 한 분만 생존하였다

550여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현재 대항의 하씨 종원은 모두 영모재공의 후손이다. 호군공이 입향한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항大項은 학풍과 문한이 많이 배출된 곳이며 선조들의 문집과 많은 문헌들이 전해오고 있고 선비들의 유향遺香이 배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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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운문 마을

 

소재지: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운문

 

진주에서 남쪽으로 고성 가는 국도를 따라 약 16㎞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보면, 영천강 너머에 왼쪽 산줄기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내리고 오른쪽 산줄기는 강에 막혀 우뚝 선 그 사이로 긴 골짜기가 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거나 안개가 짙게 낀 날엔 잘 보이지 않다가, 운무가 서서히 걷히면, 마치 대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집안이 드러나듯이, 골짜기가 드러나고 거기에 아늑한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운문 마을이다. ‘구름문’이 축약되어 ‘굴문’으로 불리다가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운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가지는 거의 없고 밑동만 남아 수령이 족히 500 여년은 됨직한 고목이 이 마을의 깊은 유서를 말해주고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역시 수령이 500 여년을 넘을 듯한 정자나무가 있고 그 옆에 만석 거부巨富 때 열두 대문 중 두 번째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돌다리가 옛날의 영화를 말해 주는 듯하다.

 

증 문하시랑 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을 시조로 모시는 진양 하 씨가 언제부터 이곳에 마을을 형성했는지는 문적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 운수당 실기 등 문헌에 의하면,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운수당 공께서 이곳 본가에서 탄생하였고, 운수당 아버지 거제현령 휘 계지 공께서 1470년 이곳 본가에서 별세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운수당 증조 안린 공부터 헤아려도 6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동안에 진양지나 조선 지리지, 진주 연계안 등의 문헌을 보면 중조 휘 안린 이후 운문에 살았던 진양하씨 후예들의 사적이 많이 실려 있어, 지난날 이곳 선조들의 충효와 학행을 말해 주고 있다.

 

마을을 지나 집들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깊은 골짜기가 있으니, 운수동雲水洞이다. 산자락에 운수당과 우봉에서 이건移建한 망추정, 시조와 운수당공을 모신 경인사와 율수재가 모여 있고, 그 옆에는 진사 휘 취양 제단과 선계先系 모록冒錄을 바로잡고자 2003년 종장宗丈이신 운당雲堂 현식炫植 씨께서 세운 선계사재조명 기념비가 있다. 서편 뒤로 산 중턱에 운수당공 묘소가 있고, 묘역에 있는 문인석은 왕가의 하사품인데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는 거석으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 골짜기는 바로 운문 종사宗史의 산실産室이며 보고寶庫인 셈이다.

 이젠 세태의 변천으로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이 운문 마을을 중심으로 약 백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선조들의 유풍遺風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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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동 마을

 

소재지: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우동

 

함양읍에서 2km 위천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다. 소백산맥이 남으로 치달아 육십령을 거쳐 백운산에서 마음껏 솟았다가 여유롭게 다시 달려 괘관산을 이루고 괘관산에서 벋어 내린 산자락이 살며시 병풍처럼 펼쳐 멎은 곳, 좌우에서는 위엄이 있는 필봉산과 매봉산의 호위를 받고 있는 탁 트인 공간에 취락을 이루고 있으니 반촌의 입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조선 중종 때에 목민관으로서 선치善治로 명성이 높았던 목사공 하우치河禹治의 차남인 양암陽菴공 하활河活 1508-1580이 진주 단목에서 옮게 와서 이거한 뒤 근 450여 년 동안 학자 효열 잠영簪纓이 속출한 진양하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 형국이 소의 목과 흡사하다고 하여 우루목牛項이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우동愚洞으로 바꾸어 표기하다가 일제 강정기에 도천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을입구에 하맹보, 하원용, 하필명의 정려 삼위가 서있고 마을 안에는 영조의 명으로 창건한 진산부원군 문충공 하륜河崙의 부조묘가 있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비로 중수하였다. 문충공의 충절만큼이나 고색창연한 사당을 후손들이 온갖 정성을 바쳐왔기에 숱한 부칩浮沈을 거듭하면서도 사족으로서 명예를 높이고 긍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년 음 11월에 향례를 올리면서 공의 충절을 기린다.

 

문충공 사당에서 조금만 옮기면 매봉산 자락에 크고 웅장한 경양재景陽齋가  우뚝 서 있다. 이 재실은 입향조인 양암陽菴공과 세분의 아드님 맹보孟寶 중보仲寶  계보季寶를 경모하려고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재실이다. 위천 강변에 울창하게 서있는 숲은 양암공陽菴公이 우루목에 복거 하면서 조성하여 후손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강변을 따라 오르면 원계정遠溪亭 하한정夏寒亭 수옥정潄玉亭이 있다.

선조들이 자연을 즐기며 찰리察理하고 심성을 함양하며 때론 소객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던 귀중한 유산으로서 우루목 하씨의 학풍이 돈독함을 대변해준다.  예전에는 하씨가 200여 호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50여 호의 종원 들이 돈후한 풍속을 지켜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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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병둔 마을  

 

소재지: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 병둔

 

병둔 마을은 사천에서 삼천포 방향으로 구도를 따라 약 4㎞가면 사남면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가 병둔 마을이다. 마을 명칭을 병둔이라 함은 임진왜란 때 당나라 병들이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여 이름한 곳이다. 마을의 서쪽에 당병소唐兵所란 명지가 있다. 당병소란 임진왜란 때 동정군과 종호군을 지휘하던 동일원 제독이 선진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과 싸우기 위해 진을 쳤던 곳이다.

 

당나라 군사가 성의 도진 의흥군에게 밀려 달아날 때 밤에 지리를 잘 몰라 사남면 죽전마을 하류에 있는 소(沼)에 밀려들어 빠져 죽었으므로 그 뒤에 이소를 당병소唐兵沼라 불렸다. 병둔 마을은 고성군 무이산武夷山의 내맥으로 이구산尼丘山과 성황산城隍山이 두르고 또 동남에서 뻗어 내린 와룡산臥龍山의 줄기가 빙돌아 감싸고 있다. 서쪽 해안가의 일부만 평야를 이룰 뿐 대부분이 산간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간지는 죽천강竹川江이 흐르는 협곡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죽천강이 흐르는 강가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구인 고인돌 무덤이 무수히 발견되어 먼 선사 때부터 농경문화가 이루어진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해양 불교의 전래설이 짙은 귀룡사歸龍寺와 부도곡浮屠谷 그리고 흥보사 등의 큰 사찰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옛날에는 불교가 번창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이곳 병둔 마을은 약550여 년 전 한성판윤 유游의 손자 저箸공께서 이곳으로 전거奠居하여 살아오면서 동안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유수한 학자들이 속출하여 하가의 명성을 얻은 집성촌이다. 마을 남쪽에 4칸 팔작형의 지붕을 오린 사상재泗上齋가 있다. 사상재는 저箸 공과 후손들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이다.

 

저著 공께서 이곳 병둔 마을에 정착한 이후 유수한 문인학자들을 배출하였을 뿐 아니라 선조들이 남긴 덕과 유행이 배여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70여 호 살았으나 객지로 이거하고 현재 30여 호의 종원들은 화목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하씨가 이곳 병둔 마을에 살게 된 것은 약 550여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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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주 마을

 

소재지: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서주

 

함양군 부림면 소재지 삼거리에서 후천면 쪽으로 조금만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마천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유림면 서주마을이다. 서주마을은 임천강을 사이에 두고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함양군 유림면 과 마주하고 있고 서주는 임천강의 서쪽에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서주라 하였다.

 

이곳은 고려 충절신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 하공진河拱辰공의 후손들이 300여년 동안 하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 이다. 남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 줄기가 뻗어 내려와 마지막으로 멈춘 화장산花丈山의 아늑한 품이 예사롭지 않고 남동으로 수뢰한 왕산王山-仇衡王이 펼쳐져 있으며 서주에는 아픈 역사의 흔적이 마을 한 모퉁이에 남아있다. 1951년 음력 정월 초 무렵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죽음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며 전쟁이 가져다주는 하나의 비극이 이곳에 묻혀있다. 300여 년 전 영조 조에 호군공 하비河備의 11세손  대해大楷공께서 이곳으로 전거하여 대를 이으며 살고 있다.

 

입향조 대해大楷공의 질자姪子 묵재공 달영黙齋公達盈은 수수洙水와 임천강이 합유하여 경치가 아름답고 아름드리 장송이 우거진 속에 무우대舞雩臺를 쌓아 풍청월명風淸月明할 때 많은 유현儒賢들과 풍유風流하고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였다. 무우대 서편에 4칸 규모의 팔작형 지붕을 올린 영귀정詠歸亭은 입향조 대해大楷공과 후손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영귀정 옆에 서있는 비는 유림儒林에서 세운 묵재공의 사적비이다. 이곳 서주 마을은 예전에는 하씨가 60여호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시대의 변천으로 각처로 이거하고 현재 30여호 남아 종원들 사이에 서로의 격려와 보살핌으로 정답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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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사촌 마을

 

소재지: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

 

이곳 마을은 1906년 진주목에서 분리되어 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로 개칭되었다. 남쪽은 신안 강이 휘감아 흐르고 마을 뒷산은 이구산尼丘山이 웅자를 뽐내며 솟아있는데, 산이 마치 공자의 탄생지와 닮았다고 하여 이구산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이 이구산 아래 오래된 기와집과 옛 담장들이 즐비하여 600여년을 이어온 하씨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 주듯 아늑하고 고풍스러운데, 이 마을이 여사촌餘沙村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걸쳐 명현들이 많이 태어난 곳으로, 이곳은 진양하씨 사직공 하진河珍 후손들의 세거지이며, 원정공 즙楫 고헌공 윤원允源 봉산군 유종有宗  목오공 자종自宗 군사 계종啓宗등과 그 후손들이 하(河)씨의 명성을 울리며 살아온 집성촌이다. 특히 사직공의 9세손 원정공 즙楫 께서 심은 매화나무와 즙楫 의 손자가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국립 산림과학원 측정 수령 700년 된 감나무가 있다. 이 감나무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로 전형적인 토종 반시 감 원종으로 평가 하고 있다. 대사간공 결潔의 후손인 태계台溪공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고 원정공 즙楫의 고택에 석파 대원군의 친필 원정 구려元正旧廬가 있다. 현재 이 마을은 근간에 예담 촌 옛 담장이 많은 곳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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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선동마을

 

소재지: 고성읍 덕선리 선동

 

선동마을은 고성과 금곡간 1006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도로가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그늘리”였다. 구한말에는 마을 입구에 무성하게 우거진 숲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어서 그늘리라 이름답게 지나가는 길손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마을 뒤쪽에 대가저수지를 만들면서 숲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 토목용으로 사용하였고 그 자리에 한길을 내고 수로水路를 파면서 숲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 숙종대왕이 밝은 달밤에 신하를 거느리고 야행을 하였는데 이 마을에 이르러 달빛조차 비치지 아니함을 탐복하여 마을 이름을 ‘그느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민담이 전해져 올 정도로 숲이 짙었던 모양이다. 마을이 생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우리 진양하씨가 조선 영조조 때 18세기 중엽에 입촌한 후 260여 년간 살아온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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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봉 마을

 

소재지: 전남 영광군 홍농읍 상하리 하봉 마을

 

남해안 고속도로를 따라가다가 영광 인터체인지에서 나가 서쪽으로 약 10분을 가면 길 양쪽에 온통 굴비를 선전하는 글자들이 많이 보인다. 법성포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9km를 더 가면 흥농읍 입구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도농 복합의 소도시小都市이다. 마을 뒤에는 두 준봉峻峰이 솟아있는데, 상봉上峰, 하봉下峰이다.

 

마을 이름도 상봉자락은 상봉마을, 하봉 자락엔 하봉마을, 둘을 합쳐 상하리上下里 라 한다. 두 준봉을 아울러서 봉태산峰台山이라 하는데, 옛날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곳이다. 이 하봉 마을이 진양하씨 문충공 후 영광계 종원들의 집성촌이다. 지금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지만 예전엔 모두 바다였던 곳이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약100여 호의 집성촌이었지만 지금은 50여 호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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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월횡 마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마을 뒤 월봉산月峯山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영판 십야월十夜月같아 마을 이름이 월횡月橫(月恒)일 것이라 한다. 청암의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회신․궁항․위태의 3개 골짝 물을 모아 경사진 협곡 10여리를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도덕골의 효자도孝子渡에 이르면 이곳 지명에 놀라 기氣가 꺾인 듯 순하게 흐르기 시작하여 월봉산 아래에서 잔잔한 호수처럼 변한다. 석양 무렵 이 호수에 비친 월봉산영月峯山影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산수가 잘 어우러진 명승名勝이요 명당明堂이다. 이조 중엽 하대관(謙齋의 曾孫)의 문집에 의하면, 월횡교 남쪽 산자락 일대 3000여 평에는 대수大樹 천여 그루가 우거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곳에 대수정大樹亭이 있어 경절공 하숙보 장군․ 장령공 하계보․ 지평공 하 충․ 겸재공 하홍도 등 하씨河氏의 여려 명현名賢들이 즐겨 놀던 곳이라 하였다. 이후 이곳 월횡 출신 명현名賢들이 월촌(하달홍), 월고(조성가), 월주(하조헌), 월포(정광익), 월산(조성주) 등 ‘월月’자字를 넣은 호號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처럼 월횡인月橫人들은 “달 속에서 나서 달 속에서 살다 간다” 하였다. 동리 앞 도로변을 택거리大巨里라 하였는데 진주‧ 단성‧ 하동으로 가는 삼거리로 일제시대 까지는 이근처의 산물産物이 모여드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세종 갑인년(세종16년,1434) 당시 6진 개척 대업大業이 시작되던 첫해에 김종서가 함길도관찰사로 파견되고, 함길도 도절제사로 10년(1422~1432)간이나 연임했던 양정공襄靖公께서 함길도 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임지에서 북방개척 대업大業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때, 양정공의 독자獨子이신 강장공도 무장武將이 되어 야인 침노의 길목인 회령진의 첨절제사로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이해 12월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이 회령진을 맡게 되어 강장공은 영북진 첨절제사로 전임轉任되게 되었다. 회령진을 무사히 방수한 공로로 전임轉任 직전 잠시 고향을 들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이때 강장공이 거주지를 양정공의 탄생지인 수곡면 사곡리에서 덕천강을 건너 이곳 옥종면 월횡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거移居 사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곳에서 멀지 않는 청암면 궁항리에 오대사五臺寺라는 유명한 큰 절寺刹이 있었는데, 호정 하륜 선생이 소시少時에 이곳에서 숙식하며 학문을 닦은 이후로 진주의 자제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독서하며 호정 선생의 뜻을 이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진주 향교를 능가하는 학문의 요람으로 이름 난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옥종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귀주대첩의 신화를 창조했던 강민첨 장군이 진주 개경향開慶鄕에서 탄생하여 20세에 이곳 우방산에 터를 잡아 원당願堂을 짓고 43세에 등과할 때까지 23년간 학문과 무예를 닦은 곳이었다.

 

무반가武班家로서 자손들은 무예 뿐 만 아니라 학문까지 겸할 수 있는 길지吉地를 물색하던 양정가襄靖家는 오대사五臺寺와 우방산이 가까운 월봉산 아래를 명당明堂으로 여겨 이거移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 월횡에서 강장공의 네 아드님들은 월봉산을 오르내리면서 무예를 연마하고 학문에 매진하여 장자長子와 중자仲子는 음직으로 각각 선교랑과 종사랑이 되었으나, 숙자叔子 경절공(휘叔溥)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라 가통家統을 이었으며, 계자季子 장령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에 올랐고, 또한 양정공의 조카 지평공(참의공의 獨子 휘漴)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강장공이 월횡을 정주지定住地로 한 이래 경절공, 장령공, 지평공이 등과登科하게 되어 양정가襄靖家는 문‧무文武의 명문가名門家로 가격家格이 더욱 신장되었으나 16세기 초에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만나면서 양정가襄靖家는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멀어져 이곳 월횡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장령공의 세분 아드님 중 장자(諱,應)는 월횡에서 대代를 이었으나, 중자仲子(諱,順)는 사천 고자실로, 계자季子 사정공(諱,恒)은 단성 중촌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어 월횡에서의 문세門勢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양정가의 세거지가 사천과 산청 등지로 확대되었다.

 

17세기 초 찰방공(諱,遵海)의 등과登科로 중흥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19세기 중엽에는 월촌공(諱,達弘)이 학문이 높아 모한재慕寒齊에서 많은 후학後學을 지도하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등 거유巨儒들과 교유하게 되어 양정가는 문한가文翰家로서 가격家格이 크게 신장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이곡공(휘,인수)과 월주공(휘,조헌)이 월촌공의 학문을 이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백촌(휘,봉수)선생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면서 양정가를 더욱 빛나게 하였으나 이후 후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월횡에서의 문세門勢는 점점 약화되었다.

 

1780년경 함안조씨가 월횡에 입거入居하여 19세기 중엽에 월고 조성가 ․ 횡구 조성택 ․ 월산 조성주 3형제가 학문과 부富로 번성하였고, 1830년경에는 해주정씨 농포가문의 월포 정광익이 입월횡入月橫하여, 조씨와 정씨 두 가문이 월횡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후로 진양 하씨 양정가襄靖家의 후손들은 차차 월횡을 떠나 인근隣近으로 이거移居하게 되면서 월횡에서의 양정가의 문세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월횡이 양정가襄靖家의 450년 세장지世莊地였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20세기 중엽 후손들이 양정공의 사우祠宇를 이곳 월횡에 이건移建하여 경현사라 명하고 사우祠宇앞에 도천서당을 세웠다. 산업화 이후 양정가의 후손들은 거의 월횡을 떠나 현재는 안계安溪를 비롯한 인근隣近의 후손들이 도천서당을 관리하고 있으며,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경현사에서 매년 음력 3월 20일 춘향을 올리고 있다.

 

 

사곡마을

단목마을

대항마을

운문마을

우동마을

병둔마을

서주마을

여사촌마을

선동마을

하봉마을

월횡마을

건지미마을

 

12. 건지미乾之尾 마을 -사천시 정동면 건지미乾之尾

 

사천시 정동면은 사천강泗水을 따라 강 양쪽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면의 중심 되는 곳 남쪽에 이구산이 자리해있다. 옛 부터 이 지역은 산수가 공‧맹孔孟의 탄생지인 성역을 닮았다하여 사수泗水-사천의 옛지명와 이구산尼丘山을 따 부르게 되어 동방의 명지名地로 일컬어져왔다. 사천강을 끼고 고성 쪽으로 뻗은 33번 4차선 도로를 따라 정동면사무소를 지나 청널목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꺾어 돌아 800여 미터를 가면 좌측에 양정공파 사천문중의 세거지 건지미乾之尾 마을이 있다. 건지미를 줄여서 건점乾占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는데, 장반갓과 큰골산이 마을의 서북쪽을 병풍처럼 감싸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사천강의 건너편에 이구산尼丘山이 맞닿아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로 명문 양반가의 세거지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지명총람』등에서 건지미라는 마을 명칭은, 보(洑)의 물길을 쉽게 이을 수 없어 논농사가 어려운 ‘메마른 땅의 끝’ 이라는 의미의 건지미乾之尾와 건지乾地-햇볕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마을을 의미하는 미(터)가 붙어 지명으로 사용되는 곳이 많다고 하는데, 선대先代의 이거移居 시기인 17세기 말의 상황을 고려하면 마을명의 유래는 전자에 더 가까울듯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된 후 양정공파의 주된 세거지였던 옥종면 월횡마을의 부근 정개산이 새로운 산성으로 지정되면서 영무성 하응도가 별장으로 선임되자 양정공의 5대손인 참봉공諱,玄齡도 지역의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진주목사 나정언이 정개산성으로 피신해온 후로 왜적은 수천의 병력으로 공격하였고 성城이 함락되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양정공의 후손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민들이 희생되었으니 이때부터 정개산성 너머 골을 억망골億亡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란으로 월횡에서 문세門勢가 약화되었고 왜란 당시 4세였던 찰방공諱,遵海이 광해 4년 문과에 급제하여 금정도金井道 찰방을 지냈으나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인끈紱을 던지고 향리 월횡으로 돌아와 월봉산 아래에 임월재를 세우고 자질子姪을 훈적訓迪하며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기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니, 찰방공의 장자 처사공諱,楯이 전란후의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가세를 일으키고 수행의 도를 터득하여 통덕랑정5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5형제를 두었다. 5형제가 월횡문중을 재건하고 양정가襄靖家의 구심점을 이루었는데, 그중 막내 아드님 대희大熙공께서 사천 정동 건지미乾占로 이거하여 터를 잡았다. 당시 국가에서 왜란 중에 황무지로 변화된 땅의 개간을 장려하는 시기라 공께서 마을 앞들을 논으로 전환하여 후손들의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니 후손들이 공을 존숭하여 입사천入泗川 할아버지라고 칭한다. 공이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첫째 종일宗一은 강 건너 마을 노천으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노천‧초전‧서포문중을 이루고 있으며, 셋째 주일周一은 사남 죽천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죽천문중을 이루고 있다.

 

둘째 중추공諱,元一이 건지미를 지키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중추부사에 올랐으니 후손들이 대를 이어면서 건지미는 사천문중의 구심점이 되어 ‘하씨 양반동네’로 예칭 될 수 있었다. 중추공의 장손 처사공諱,龍寬의 계배繼配 분성김씨는 정조 16년 부군의 상을 당하여 순절殉節하였으므로 순조 16년 암행어사 이화李墷의 주청으로 정려가 내려져 당시의 마을 입구였던 청널목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중추공의 현손 노천공魯川公, 諱‧進圖은 학문이 뛰어나 퇴계의 주리설을 정통학맥으로 잇는 안동을 참된 마음으로 수차례 왕래하여 정재 유치명의 문하를 출입하였고 선대에서 계속 저술해온 문적을 잘 정리하여 후대로 전하게 하였다. 중추공의 6세손 초산공諱‧斌憲도 학문이 뛰어나 사천 향교 전교典校를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으니 사천지泗川誌에 “득문위기得聞爲己하여 불구성예不求聲譽하고 둔세불원遯世不怨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산업화 이전까지는 하씨 씨족마을로 이어졌으나 선족숙先族叔들의 남다른 교육열로 후손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집은 몇 되지 않지만 사천문중 회장을 맡고 있는 30세世 만홍 어른이 세장지를 지키고 있다. 정려비가 있는 청널목에 회장의 주도로 세워진 사하재泗河齋에서 매년 음력 10월 18 일 입사천 할아버지 이하 선조의 세제歲祭를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