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보(刱譜)에서 현재(現在)까지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혈통을 실증(實證)하고 혈족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문헌으로, 혈족간 소목(昭穆)의 서차(序次)와 촌수 관계를 분간하여 존조 경종(尊祖敬宗)의 정신을 앙양하고 종족간 화목 단결을 강화시켜 주는 책이다.

 

족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5세기 육조(六朝)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제대로 체계를 갖춘 것은 10세기에 이르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세 부자(父子)가 만든 소보(蘇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3세기 고려 말엽부터 족보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고, 가승(家乘)이 마련되어 오다가 체계를 갖춘 족보로서는 15세기 후반인 조선 성종 7년(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가 처음이라고 하며(1423년 문화유씨보가 나왔다는 설도 있음), 그 후 명종 20년(1565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嘉靖譜)가 간행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의 우리나라의 족보는 자녀의 차별 없이 나이순으로 수록하였으며, 친손과 외손을 동등하게 다룬 것이 특이하다.

 

진양하씨의 족보가 언제 창보(刱譜)되었는지는 증빙문헌이 없으니 알 수 없고, 진양지에 보면 문효공 하연(河演) 선생이 경태(景泰) 신미(辛未, 1451년)에 찬(撰)한 진양하씨보 서문이 등재되어 있으나 족보 실체는 볼 수 없으니, 소목(昭穆)을 밝힌 최고(最古)의 기록은 1416년에 호정(浩亭) 선생이 세운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신도비(神道碑) 비명(碑銘)과 음기(陰記)에 호정 선생의 선계(先系)와 증조(曾祖) 이하 친인척(親姻戚)을 열기(列記)한 것인데, 이것이 진양하씨 족보의 모태(母胎)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423년에 성보(成譜)했다는 문화유씨의 계묘보(癸卯譜)보다 7년 앞서고 현전(現傳) 최고(最古)의 족보라고 하는 안동권씨의 성화보(成化譜)보다는 60년을 앞서는, 그야말로 현전 최고(現傳最古)의 족보인 셈이다.

 

선대 족보 서문을 종합해 보면 임진왜란 전에도 진양하씨 족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란을 겪는 동안 산실(散失)되어, 창주공(滄洲公, 諱 憕)께서 성심을 다하여 자료를 구하시다가 상사(上舍) 이명호(李明怘)에게서 첨정(僉正) 하여관(河汝灌) 공이 소장하던 보첩 한 질을 찾아 그것을 1605년 봄에 송정공(松亭公, 諱 受一)에게 보이니, 송정공께서 조카 선(璿)을 시켜 전사(傳寫)시키고 서문을 지으셨다. 그리고 창주공께서는 견문을 더해 선사(繕寫)하여 1621년에 성보(成譜)하시고 「진양하씨족보서(晉陽河氏族譜序)」를 찬(撰)하시어 선계(先系)에 불명확한 것을 후인들이 오인(誤認)할까 염려하시면서 사실을 밝히셨다. 즉, 시조 아래에 박사공 탁회(卓回)로 계대되었지만 평장공과 박사공 사이에 이백여 년이라는 간극(間隙)이 있기 때문에 박사공이 평장공의 아드님이 아님을 밝히신 것이다. 당시에 창주(滄洲) 공께서 상서공부시랑 칙충(則忠) 공이 평장공 아드님임을 아셨지만 장자(長子)인지 차자(次子)인지 명확하지 않고 합문지후 준(濬) 공이 평장공 현손임도 아셨지만 그 선대(先代)와 후대(後代)가 미상(未詳)하니, 두 분이 다 박사공의 직계(直系)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 수 없었으므로 세계(世系)를 어지럽힐 수 없어서 시조 아래에 공부시랑공과 지후(祗侯)공을 계대(系代)하지 않고 구득(求得)한 족보대로 세계(世系)가 명확한 박사(博士)공을 계대하신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 후 1698년 무인(戊寅)에 족보를 인간(印刊)하기 위해 초안(草案)을 잡은 것이 있는데 소위 「무인보(戊寅譜) 초(草)」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정이 있었던지 간행하지 못하였는데, 최근에 진주 단목리의 단지(丹池) 공 종택(宗宅)에서 발견되어 2006년 11월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5호로 지정되어 경상대학교 부설 문천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1621년 창주(滄洲) 공이 성보(成譜)한 것을 기저(基底)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719년 숙종 기해(己亥)에 호군공 형(浻)께서 주창(主唱)하시어 통훈대부 행 초계 군수 옥(沃)과 중훈대부 사천 현감 필도(必圖)께서 개보주사(開譜主事)와 도유사(都有司)를 맡고, 간국유사(刊局有司)에 하윤시(河潤時), 하응천(河應天), 하윤흡(河潤潝), 사판유사(寫板有司)에 하윤일(河潤一), 하윤규(河潤逵), 수정유사(修定有司)에 하윤채(河潤采), 하윤관(河潤寬) 공을 맡겨 창주공의 진양하씨 족보서(晉陽河氏族譜序)를 서문으로 하고 호군공께서 발문을 쓰시어 족보를 출간하였으니, 활자화한 진양하씨 첫 족보요, 명실(名實) 공(共)히 진양하씨 첫 대동보(大同譜)인 셈이다. 즉, 사곡, 단목, 월횡, 운문 등 문하시랑공파가 상·하 두 편(編)이요, 별보(別譜)로 사직공파(司直公派), 안렴공파(按廉公派) 그 외 두어 계보(系譜)를 실었다.

 

이때 각 지단(支單)이 평장공 아래에 공부시랑공(諱 則忠)을 계대했기 때문에 여러 문중의 합의에 따라 공부시랑공을 처음으로 계대(系代)했다. 또, 이때 운문(雲門)은 시조 이하 파분(派分)이 미상이나 쌍오정(雙梧亭) 징(澂) 공의 수기(手記)에 평장공(平章公)을 시조라고 했으므로 평장공(平章公) 후손으로서 하편(下篇) 말(末)에 동보(同譜)하였다.

 

그 후 영조 경인(庚寅) 서기 1770년에는 오방재(梧坊齋)에서 기해보(己亥譜) 당시에 지었던 습정재(習靜齋) 응운(應運) 공의 서문에 치와공(癡窩公) 응명(應命)과 죽와공(竹窩公) 일호(一浩)의 후서(後序), 사시헌공(四時軒公) 응휘(應彙)와 흥와공(興窩公) 응겸(應兼)의 발문으로, 전보(前譜:己亥譜)에서 별보에 얹었던 사직공파(司直公派), 중룡파(仲龍派) 등의 계파는 빼고 문하시랑공파(門下侍郞公派)만으로 족보를 출간했다.

 

1820년 순조 경진(庚辰)년에는 오방재(梧坊齋)에서 사곡, 단목, 월횡만으로 족보를 간행했는데 수보유사(修譜有司)는 진우(鎭禹) 공과 함와(涵窩) 이태(以泰) 공이 맡았으며, 1820년 정월에 시작하여 1821년 4월에 마쳤다. 이때 송정공 서문을 수록하되 저작 연월 미상으로 하고 지명당(知命堂) 발문을 재록(載錄)하였으며, 경진보 서발문은 일절(一切) 수록(收錄)치 않고 경인보 서·발문을 그대로 실었다.

 

1876년 고종 병자(丙子) 3월 10일에 사곡(士谷), 단목(丹牧), 운문(雲門), 월횡(月橫), 함양(咸陽), 합천(陜川), 옥야(沃野), 신풍(新豊) 등지에서 모여 같이 족보를 간행하려고 보청(譜廳)을 설치하고 도유사(都有司)에 하술범(河述範), 하달홍(河達弘), 부사(府使) 하겸락(河兼洛), 하학운(河學運), 하상진(河尙晉), 교정(校正)에 진사(進士) 하재원(河載源), 하정룡(河定龍), 하홍운(河弘運), 진사(進士) 하재구(河在九), 하운범(河雲範) 등 유사(有司)까지 정했으나 족보를 발행하지 못했고, 1893년(고종 30년, 癸巳)에도 사직공파(司直公派)와 합보(合譜)하려고 시도했으나 성사(成事)되지 못했다.

 

그 후 1900년 고종 경자(庚子)년에는 사곡과 단목·월횡만으로 서·발문을 경진보와 동일하게 수록하여 경자보(庚子譜)를 간행했는데, 도유사(都有司)를 경택(慶澤), 협운(夾運), 인수(仁壽), 현원(顯源) 제공(諸公)이 맡고, 교정(校正)을 경휴(慶烋), 용운(龍運), 성원(聖源), 도원(櫂源), 조헌(祖憲), 계형(啓灐, 一名 啓涍), 정운(珽運), 인규(麟奎), 흥수(興壽) 제공(諸公)이, 감인(監印)을 헌진(憲鎭), 겸진(謙鎭) 공이, 도장물(都掌物)을 영수(永秀) 공이 맡았다.

 

1936년에는 사곡에서 주도하고 단목과 월횡의 일부가 참여하여 구 서·발문을 수록하고, 재화(載華) 공 서문에 진원(振源), 계휘(啓輝), 영욱(泳旭) 공의 발문으로 병자보(丙子譜)를 간행했다.

 

1820년 이후 동보(同譜)하지 못한 운문(雲門)은 1822년 임오보(壬午譜), 1890년 경인보(庚寅譜), 1935년 을해보(乙亥譜) 등 파보(派譜)를 간행했고, 1966년에는 운수당공(雲水堂公)의 선계(先系)를 바로잡는다는 취지에서 병오보(丙午譜)를 출간(出刊)했다.

 

그러다가 서기 1974년 가을에 대동보 편찬에 관한 의견이 제기되어 단동(丹洞) 경모재(景慕齋)에서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던 중에 상계(上系)의 계대(系代)에 이의(異議)가 제기되어 논란이 있었으나 단목(丹牧), 함양(咸陽), 월횡(月橫), 운문(雲門)은 다 함께 참여하고 사곡(士谷)은 이의(異議)가 없는 일부 문중만 참여하여 1976년에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를 출간했다. 앞부분에 구보(舊譜)의 서·발문 중 창주공(滄洲公) 서문, 송정공(松亭公) 서문, 호군공(護軍公) 발문, 지명당(知命堂) 발문, 습정재(習靜齋) 발문, 치와공(癡窩公) 서문, 죽와공(竹窩公) 서문, 사시헌공(四時軒公) 발문, 흥와공(興窩公) 발문을 차례대로 싣고, 만기(萬璣) 공의 서문(序文)에 재환(在煥) 공의 발문(跋文), 현석(炫碩) 공의 후서(後序)를 그 뒤에 실었다. 이때 도청(都廳)은 단동의 만기(萬璣) 공, 우동의 재후(在厚) 공이, 도검(都檢)은 운문의 해정(海挺), 북방(北芳)의 재환(在煥), 단동의 진(振) 제공(諸公)이, 교정(校正)은 단동의 만영(萬永), 운문의 현석(炫碩), 우동의 봉석(鳳石) 제공(諸公)이, 감인(監印)은 단동의 만진(萬璡), 백곡의 용헌(瑢憲), 운문의 종식(淙植), 우동의 주현(周鉉), 진주의 필근(必根), 창원의 천식(天植) 제공(諸公)이, 도장물(都掌物)은 단동의 계조(啓祖) 공이 맡았다. 그 후엔 많은 파보(派譜)들만 간행되어 지금에 이르렀다.